바람 씨가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이다. 아내는 바깥으로 나도는 그를 바람 씨라고 불렀다. 딸아이는 서너 살 때 엄마 말을 따라 바람 씨, 바람 씨, 하더니 중학생이 되자 엄마와 함께 바람 아빠라고 불렀다. 그는 아내와 딸의 놀림을 암묵적인 수긍이라고 생각하고 그 호칭을 은근히 즐겨왔다.  바람 씨는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와 우뚝 멈춰 섰다. 평소 같았으면 찌푸린 얼굴로 집안을 한번 휘둘러보고 바로 베란다로 나가 심각하게 담배를 피우던 그가 박을 탄 흥부처럼 입을 한껏 벌렸다.  와! 우리 집 맞아? 어찌 된 거야!  폭탄 맞은 듯 아수라장이던 집이 말끔하게 변신한 것도 놀라웠지만, 공부라고는 하지 않던 중학생 딸아이가 책을 읽는 모습은 실로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맞벌이 부부인 데다 둘 다 성취 욕구가 강해 자기 세계에 빠져 사니 자연히 가사에 소홀했다. 바람 씨는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자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그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분식집에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시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 돌아갔다. 아내에게는 회사 일이 바쁘다고 거짓말했고, 돌아갈 때는 꼭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을 하고 들어갔다.  이야, 우리 딸이 독서 삼매경에 빠졌네. 무슨 책 읽어? 바람 씨는 허리를 낮춰 소녀가 읽는 책 표지를 들여다봤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닉수재니스가 지은 책이었다. 최고의 그래픽 노블, 주목할 학술도서라고 씌어있었다. 그래픽을 훑어보던 바람 씨가 외쳤다.  이거 대단한데! 나 좀 빌려줘.  아빠는 만화라면 질색이잖아요.  소녀는 책을 빼앗아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쪽을 펴고는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 상상력을 키운다.  아빠는 몇 차원에 살아요? 바람 씨의 머리에서 건전지가 방전된 도어록처럼 띠르르 소리가 났다. 당황해하는 아빠를 본 소녀가 초분초분 말하기 시작했다.  1차원은 선 세계(라인랜드), 2차원은 평면 세계(플랫랜드), 3차원은 공간세계(스페이스랜드)예요. 차원 개념이 없는 점세계(포인트랜드)도 있어요. 이 책에 있는 내용이야?  네, 자주 언급하지만 '플랫랜드'라는 소설에 자세히 나와요. 라인랜드에 사는 왕은 직선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했대요. 플랫랜드의 사람은 스페이스랜드를 이해하지 못했고, 스페이스랜드의 사람은 4차원, 5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진짜 웃기는 건 포인트랜드의 사람이에요.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다니…  바람 씨는 순간 자신은 어느 랜드 사람인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플랫랜드나 포인트랜드 사람 같았다. 다행히 소녀가 바람 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소녀는 다시 책을 읽었다. 저녁 바람이 상큼하게 피부에 와 닿자 바람 씨의 머릿속에 반짝, 초록 불이 켜졌다. 소녀가 생각에 잠긴 바람 씨에게 물었다. 가소성이 뭐예요?  그거야 외부에서 힘을 받아도 본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성질이지. 합성수지처럼. 그게 왜? 존듀이가 이렇게 경고했대요.  -가소성이 우리를 습관의 노예로 만드는 주범이 된다. 그래서 점차 우리는 유연성을 잃어간다. 아빠도 가소성을 버려 봐요. 매일 바람처럼 다니지 말고. 늘 같은 길을 오가는 통근길이 한 사람의 세계를 축소시킨다고 하잖아요.  바람 씨는 딸아이의 비범한 말솜씨에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책 누가 골라줬어?  엄마지요.  엄마가 이런 책을!  엄마가 집을 좀 치우지 않고, 아빠 눈에 내가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는 관점의 차이 아니겠어요? 루돌프 아른하임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어요.  -본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말 아닌가요? 아빠, 이제 내가 집 정리 잘할 테니 일찍 퇴근해요. 바람 씨가 내가 졌다는 뜻으로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나는 활이요, 내 딸은 이미 나를 떠난 살아있는 화살입니다. 바람.  카릴지브란의 표절인 줄 내가 모를까 봐?  바람씨와 소녀는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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