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1483-1546)는 500년 전인 1517년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 교회 문에 大赦府를 반박하는 95개조를 붙임으로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올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루터는 대사에 관한 95개 반박문으로 인해 로마 교황청에 고발당하고 교황청에서 파견된 사절단과 3년간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논쟁을 하였다. 루터는 이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1520년에 쓴 세 권의 책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즉 그리스도교적 상태의 개선에 관하여 독일 국가의 그리스도교 귀족들에게 고함,교회의 바빌론, 그리스도교의 자유이다.1519년 루터는 "나는 이제 교황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적이다 라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말했다. 로마 교황청은 루터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1520년 교황칙서 '엑수르제 도미네'(Exurge Domine)로 루터가 제기한 95개 논제들 가운데 41개 논제들을 단죄했다. 이에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에 비장한 각오로 이 칙서를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교황청은 1521년 1월 루터를 파문하였다. 그 다음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로 구성된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된 루터는 카롤 5세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자신에게는 성경과 양심을 따를 의무가 있다고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결국 황제는 루터를 이단자로 선고하여 파문하였다. 한편 레오 10세 교황(1513-1521)이 반포한 聖年 대사는 1515년 3월 31일에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건립기금을 위한 것이었다. 대사에 대한 설교가 중에 요한 테첼은 신학적인 지식이 별로 없으면서도 대중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행업을 완수하는 자체로 하느님의 은총과는 상관 없이 그 공로에 대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돈이 헌금통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연옥영혼은 연옥에서 해방된다고 설교했다"루터의 주장대로 교회가 베푸는 대사가 잘못 해석되어 전해지는 부작용도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루터는 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받았고 교회는 분열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년이 되는 해에 루터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려는 움직임이 가톨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20세기 가톨릭의 저명한 신학자인 발터 카스펴 추기경은 그의 저서 "마르틴 루터"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루터의 관심사는 교회의 분열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복음적 개혁이라고 하면서 바로 95개조 반박문1조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항상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루터의 개혁은 처음부터 회개에 대한 그의 신학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호소한 회심의 맥락 속에 놓여 있었다. 루터는 종교개혁가 아니라 개혁가였으며 별도의 개혁 교회 창설자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표는 복음에 근거한 가톨릭 교회 즉 전체 그리스도교의 혁신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인식과 오직 그리스도였다. 따라서 루터는 루터 이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의 오랜 전통의 연장선에 있었다. 특히 형제들과 함께 그저 복음을 살고 그럼으로써 복음을 전하려 했던 아씨시의 프란치스꼬 성인을 떠올릴 수 있다" 루터의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교의 분열로 이어진 것은 가톨릭과 루터 양쪽에 다 원인을 둔 대단히 복잡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회개에 대한 루터의 호소를 그 당시 로마에서 주교들이 경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의 이유인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참회하며 꼭 필요한 개혁들로 대응하지 않고 논쟁과 단죄로 답했다. 교회의 개혁에 교회를 분열시키는 종교개혁으로 된 데에는 로마의 공동 책임이 아주 크다.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는 특사를 통해 1523년 뉘른베르그 제국 의회에서 이미 이러한 공동책임을 인정하였다. 로마 교황청과 주교들은 루터가 외치는 회개 및 개혁에 대한 호소를 듣지 않았다. 루터는 오히려 1518년 아우크스부르그에서 카예타노 추기경으로부터 심문을 받고 1519년 요하네스 에크와 라이프취히 논쟁을 벌인 뒤, 1521년 마침내 로마의 파문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의 파문을 받은 루터는 교회와 등지면서 결국 종교개혁가의 길을 가게 되고 그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을 넘겨주게 되었다. 1965년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를 늦게나마 선언하고 교회일치 운동에 노력하게 된다.그것은 가톨릭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과는 달리 교파적으로 제한되지 않는 원래의 보편성에 대한 재발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015년 프란치스꼬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일치의 보편적 지평을 다시 한 번 생태학적이고 우주론적으로 넓혔다.교황은 2017년 1월 19일 바티칸을 방문한 핀란드 그리스도교 일치운동 관계자들을 만나 "오늘 날 루터교와 가톨릭은 일치하는 관점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도 마음 속에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