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구의 알젠틴 출신의 예수회원인 호르혜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이 베네딕또 16세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교황좌에 추기경들의 콘클라베가 열린지 이틀 만에 추기경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2013년 3월12일 265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현대의 새로운 교황상을 보여주는 교황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 요한 23세의 현대화(Aggiornamento)에서 시작되었다. 요한 23세가 전임 비오 12세의 계승자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베니스 교구의 론칼리 추기경이 나흘 동안의 힘든 콘클라베 속에서 77세의 고령에 과도기적인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과도기 교황이라던 요한 23세가 오늘의 카톨릭 교회의 모습으로 새 교회상을 보여주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중세적 굴레를 벗어나 세계 교회의 외연에 맞추어 추기경단의 규모를 배로(140명) 늘렸다. 사제직의 통치권은 이태리인들에게 귀속되어 있었는데 이제 비이태리 출신 교황의 등장이 예견되었다. 과거 교황들은 바티칸,라테라노, 카스텔칸돌포 만을 왕래했으나 요한 교황은 공장 노동자, 복지 시설 거주자, 교도소 재소자 등의 평범한 사람들과 사귀고 대화하기를 좋아했으며 무신론자인 쏘련의 후루시초프 사위인 아슈르 베이를 개인 알현하기도 했다. 요한 23세에 이어 바오로 6세 교황이 중지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 하기 위해 교황좌에 오른다. 전임 교황의 세계에 대한 개방성과 교회 일치를 위한 변혁은 계속되었다. 비오로 6세는 바티칸의 국무성에서 오래 일했으며 세심함과 뛰어난 지성를 갖추었으며 영성적인 인물이었다. 계속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사람과 대화하기를 원하는 일종의 사목적인 공의회가 되기를 원하면서 敎義의 정의나 단죄가 없었다. 주요 문헌으로 종교 자유 선언과 일치운동에 대한 교령을 펴냈으며 가장 주요한 문헌인 교의헌장과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을 통하여 교회 내외의 입장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제도에 있어서도 로마 교황청에 자문기구인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를 신설하고 개별 교회에 주교회의를 신설하고 교구에도 사제평의회를 만들어 주교를 자문케 하였다. 교황은 유엔과 이스탄불, 예루살렘을 방문하면서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공의회를 마무리 하고 공의회 정신을 교회 내에 깊게 심어 주었다. 다음 교황으로 요한 바오로 1세가 등극하나 갑작스런 서거로 33일만의 단명으로 교황 임기가 끝난다. 다음 교황으로 58세의 젊은 교황이 동구권 폴란드에서 요한 바오로 2세라는 교황명으로 등장한다. 1378년 이래 첫 비 이태리계 교황이다. 그는 세계무대에 새로운 스타일의 교황으로 등장하면서 대중 매체의 교황으로서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고 재임기간 동안 130개국을 방문하면서도 해방신학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취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2005년 노환과 저격사건의 후유증으로 선종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으로 신앙교리성성 장관이던 독일 출신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베네딕또 16세가 된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요 교수로서 그의 통치방식은 전임자와 비슷했다. 그는 2005년에 선출되어 2013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갑자기 사임하게 된다. 아무도 예기치 못하고 1294년 첼레스티노 교황의 사임 이후 두 번째였다. 전임 교황과 후임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의 사임 이후 존경과 인기가 더 높아졌다. 베네딕또 16세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교황좌에 알젠틴의 베르골료 추기경이 선출되어 프란치스꼬란 교황명을 처음 택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꼬는 가난한 사람, 평화로운 사람,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고 보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 선출 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에서 신자들 앞에서 처음으로 섰을 때 교황의 영광과 우위를 드러내는 전통적인 상징들을 입거나 달지도 않고 주교로 일할 때 쓰던 철제 십자가를 목에 걸고 전례적인 인사말이 아닌 보통 사람의 인사말인 Bona sera(좋은 저녁 되세요)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첫 인사를 하였다.  사도의 강복을 주기 전에 하느님께서 자기를 축복하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허리를 굽혔다.프란치스꼬 교황은 알젠틴의 도시 변두리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에게 영향을 끼친 신학은 해방신학자 루시오 헤라의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신학은 계급투쟁의 이념이 아니라 조화와 평화,그리고 화해와 사랑을 주도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교황은 바오로 6세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이어 받아 공의회 후기 시대로 공의회 수용의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는 신학교 교수, 수도원 관구장, 주교로 일하면서 사목과 관련된 경험을 얻었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복음의 뿌리로 돌아가 오늘 날 세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의 행보는 프란치스꼬 성인을 본받아 가난과 겸손함 속에서와 예수회 창설자 로욜라 이냐시오 성인의 통찰력을 통하여 세계의 상황을 보면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처럼 내려 놓고 복음의 정신에 근거하여 오늘의 카톨릭 교회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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