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스스로 부끄럼이 있으면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을 말아야 함이 당금하다. 그러나 그리 말쑥해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신은 돌아보지 않은 채, 타인의 해묵은 사소한 흠결까지 들추어내어 자격 운운함도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자신들의 주장대로 하면 협치(協治)이고, 반대를 수용하지 않으면 파행(跛行)인가? 좋은 경력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도덕성이 결여되고, 한 점 흠결이 없는 사람들은 스팩이 부족하고 능력을 의심받는다.  먹음직스럽고 빛깔 좋은 과일은 농약에 오염되어 있고, 무농약 식품은 몰골이 거슬린다. 보은(報恩)하면 대의(大義)에 어긋나고, 보은하지 않으면 의리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코드를 맞추면 코드인사라 하고, 코드가 맞지 않으면 프로그램은 다운된다. 양시론(兩是論)을 견지하면 줏대가 없다 하고, 한 길을 가자 하니 독선(獨善)을 문제 삼는다. 싸우지 않으면 유약(柔弱)하고, 싸우면 호전주의자가 된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바보가 되고, 입을 열면 말이 많다고 한다. 서 있으면 떠밀고, 앞으로 가면 뒷덜미를 잡는다. 주의하지 않으면 경솔하다 하고, 주의하면 우유부단(優柔不斷)이 된다. 이 시대 인간의 지성(知性)은 무엇이며, 무엇이 진리일까? 진리는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는 정의될 수 없다. 진리를 정의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닐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정의(定義)는 정의하는 자의 주관이 배제될 수 없고, 주관으로 진리라는 객관을 정의함은 사변적(思辨的)모순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어떤 궤변으로도 부정되는 것이 아니며, 또 궤변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임명직 고위 공직자에 대한 검증은 민주정치의 당연한 절차이기도 하지만, 대의기구가 그 결정권을 가지지는 않는다. 다만 위임받은 권한으로 대상을 검증하되, 민의(民意)를 따라 결정권자가 결정하면 그 결과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제도가 아닐까? 난파선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그가 비록 명의(名醫)가 아니더라도 응급처치를 시켜야 하는 것이며, 환자가 목숨을 구하면 그 후에 명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우선 좌초된 난파선을 띄우는 일이 급하고, 여기서 더 머뭇거려 실기(失期)하면 그 어떤 원칙도 명분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임명권자는 신이 아니며 피임명자도 신이 아닐 뿐만 아니라 검증하는 자들 역시 신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완벽을 추구함이 정치의 본질인 것은, 이상(理想)이 현실과 달라도 이상이 현실을 개선한다는 사실로 귀납(歸納)됨과 같다. 따라서 이상적이지 않다하여 추달하기 전에 모두가 자신을 반조(返照)하고 자성(自省)의 기회로 삼아야 옳지 않겠는가? 정권이 바뀌고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 마다 반복되는 파행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이후 좀 더 완벽한 임명권자와 좀 더 완벽한 피임명자, 그리고 좀 더 완벽한 검증자를 내기 위한 이상(理想)이 미래를 개선할 것이다. 이상은 추구하되 현실을 버릴 수도 없으니, 현실을 취하되 이상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는 좀 더 낳은 세상이 되지 않을는지?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지극히 단순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의가 정의를 징치(懲治)하고, 현실이 이상을 핍박하며, 진리가 궤변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일 뿐, 다른 원인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진리가 함부로 정의되면서 가치관이 흔들리고, 현실이 이상을 핍박하면서 미래가 실종되었다. 국회는 민의를 대변하고, 언론은 대중의 소리를 대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자신의 논리로, 자신의 목소리로 정의(正義)를 정의하려든다면 이미 그것은 정의일 수 없다. 과거를 살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에 과거의 행태를 보아 오늘의 파행은 예고된 것이지만, 개과천선(改過遷善)이란, 언어의 유희일 뿐 인간은 결코 개과천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달라지라 하고, 달라진다 해도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니 달라지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가 달라지면 어떨까? 좀 더 현명하고, 좀 더 엄격하며, 좀 더 무서운 국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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