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 시민들의 아침을 깨우는 시절이 있었다. 이른 새벽 신문팔이 소년의 뜀박질로 하루의 심장박동이 시작되고 자욱한 새벽안개에 눅눅하게 젖은 대문 앞 신문을 집어 들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시민들의 삶이었다.  그 속에는 온갖 소식과 정보가 담겨 있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잉크냄새 풀풀 나는 신문을 뒤적이면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과 이웃의 이야기들을 챙겨봤다. 그 시절은 불과 10여 년 전까지 계속됐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나는 신문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신문을 택일하라면 후자를 택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 사회적 공기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랬다. 신문이 정부보다, 정치보다 더 상위개념에 있던 시절도 있었다. 사회의 나아갈 방향과 시민의 가치를 선도하고 사회적 판단의 잣대를 만든 것이 신문의 역할이었다. 신문은 사회적 공기였으며 소금과 목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신문의 역할은 크게 위축됐다. 엄청나게 다변화된 매체의 범람과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신문이 가야할 바를 잃었다. 신문은 그 자리에 있지만 독자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체에 대한 분별력이 떨어지고 자극적이고 표피적인 읽을거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문만 망가진 것이 아니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수용자들의 입장에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거기에서 상업적 성패를 걸었다. 언제 어디서나 열어볼 수 있고 열람할 수 있는 모바일 언론환경 속에서 신문과 방송은 존폐여부가 위태롭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은 옐로 저널리즘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통 언론은 꼿꼿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망으로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가야할 길만 묵묵하게 걸어가는 신문과 방송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되며 잘못된 권력은 붕괴한다. 그래서 언론의 힘은 아직 건재하다고 믿고 있다. 얼마까지 갈 것인가.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다. 젊은 세대들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관은 시작된다. 엄청난 숫자의 SNS를 통해 그들만의 언론을 만들어가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이다. 정통하거나 정확한 팩트도 없이 개인의 추측성 글을 올리지만 그것이 재미있고 자극적이면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래서 가짜뉴스는 양산되고 그 영향력은 치명적이기도 하다. 지방의 언론은 더 열악하다. 구독료로 살아가던 시대는 벌써 끝났다. 결국은 광고로 버텨야 하는 것이 지방 언론의 생명이다. 지방의 건강한 언론을 살리려면 결국 시민이 나설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한 언론의 주인이 되고 그 언론을 지켜나가는 길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야 그 도시는 건강한 언론으로 정화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기업도 지방의 언론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이 그 지역의 문화에 지원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면 지역의 언론을 지원하는 것 또한 중요한 방법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언론은 자기의 어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 번 정한 논조로 곧게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이 수긍하고 지지한다. 옳은 것은 항상 옳고 그른 것은 항상 준엄하게 꾸짖는 힘을 가져야 시민들이 그 언론을 향해 박수를 친다. 경영 때문에 눈치를 보거나 담합한다면 그때부터 언론은 생명력을 잃는다. 경북신문이 창간 9주년을 맞았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경북의 정통언론으로 자리잡기 위해 부단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일찌감치 정도를 버렸더라면 더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언론이 지켜야 할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은 결과 외형은 넓혀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신뢰는 깊어졌다. 내년이면 10주년이 되고 한 마디를 맺게 된다. 지령이 늘어나면 그 신문의 힘은 더 강해진다. 강해진 언론의 힘으로 사회를 정화하고 지역의 여론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결국 신문을 만드는 이들의 꿈이다. 기자는 현장에서 뛰고 경영자는 건강한 언론 환경을 만드는데 주력한다. 시민 모두가 내 신문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경북신문을 격려하고 지켜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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