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은 '칼자루'를 잡은 편이다. 그래서 '칼날' 잡은 을(乙)을 통제할 수가 있다. 을에 대한 갑의 횡포를 뜻하는 의미로 요즘 '갑질'이란 말이 유행이다. 나아가 수퍼 갑질, 울트라 갑질이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갑도 언젠가는 을이 될 수가 있다. 소위 먹이사슬 구조에 있어서는 한 쪽으로 갑이면서 동시에 다른 쪽으로는 을인 경우도 있다. 갑을관계에서 갑은 을에 대해 권한을 행사하기 쉬우면서도, 대등한 관계에 있을 때보다 사람을 사귀기도 더 용이하다. 갑으로 있을 때 '소인'(小人)은 '힘'을 행사하지만 '대인'(大人)은 '인간관계'를 넓히는 것이다. 갑일 때의 인간관계 넓히기, '역지사지'(易地思之)가 그 출발선이다. 갑이 을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어렵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필자가 정부 실무 과장급 시절에 원 소속 부처를 떠나 타 부처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1년 정도 지나면 원 부처로 돌아가는 것이 통례이나 당시 인사 상황이 좋지 않아 2년을 넘어 3년이 되어 가는데도 원 소속에서 불러주지를 않았다. 인사가 있을 때마다 복귀 신청을 했으나 필자에 대한 검토는 없었다. 이러다가 여기서 공직을 마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갑갑한 심정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 소속의 인사과장 K씨가 전화로 소속기관 초임직위로 복귀할 것을 제시했다. 그 인사과장은 지방에서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도 잘 모르던 공직 선배였다. 예정 보직이 맘에 들지 않겠지만 그래도 돌아오겠느냐고 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3년 만에 원 소속으로 복귀한 적이 있다. 공조직이든 사조직이든 인사과장은 바쁜 직위이고 일반직원에 대해서는 갑이다. 조직에 따라서는 수퍼 갑인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당시 그 K 인사과장이 초면 수준에 전화로 의사를 물어봐 준 것은 꽤 친절한 '갑짓'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갑이자 바쁜 인사과장이 부하를 시키지 않고 직접 전화를 해준 데 대해 매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 후 어떤 저녁 자리에서 그 K과장을 만났을 때 '사랑한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 K 과장을 사랑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세월이 흘러 필자가 미국 워싱턴에 주재관으로 있고 그 K 과장은 승진하여 J도 부지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 J도 직원들이 워싱턴에 출장을 왔다. 출장 귀국하는 그 직원들한테 K 부지사에게 전언을 부탁했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더라!'고 미국에서.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K 선배에 대한 고마운 생각이 남아 있다. 그는 그 후 국회의원도 지내고 지금은 모 부처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다. 갑일 때 역지사지로 조금이라도 베풀 줄 아는 사람은 관운(官運)도 있는 것인가! 갑 위치에 있는 사람은 수시로 한 번씩 칼날 잡아보기를 권한다. 갑의 입장에서 을의 심정을 알기 위해 반대로 칼날을 쥐고 자기 성찰해 보자는 것이다. '갑질'이 아니라 좋은 '갑짓'을 하기 위해서이다. 갑이면서 중간관리자 이상인 조직인은 훌륭한 '갑짓'을 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업무의 세세한 부분은 실무자에게 맡기고 본인은 보다 전체적인 시각에서 수시로 고객과 을의 입장을 역지사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갑은 '자원'을 관리하거나 권리의무를 통제하는 자이다.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갑이 있는 것이다. 을이 바라는 것을 어차피 다 줄 수 없다. 다 줄 수 있다면 이미 갑이 아니다. 다 못 주기 때문에 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을이 원하는 바대로 도움을 주지 못한 경우라도 갑의 진정성 있는 '설명'은 '인간관계'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을의 말은 갑에 대해 별 힘이 없지만, 갑의 말은 을에 대해 위력이 있다. 을의 설명은 '논리'가 있어야 겨우 갑에게 '들리지만,' 갑의 설명은 '해명' 수준이라도 을에게는 '울리게' 된다. 갑의 '최악'의 행동은 '화내는 것'이다. '갑의 화'는 '을의 원한'으로 싹이 튼다. 차악(次惡)의 행태는 앞에서 예스(yes), 뒤에서 노(no) 즉 '표리부동'(表裏不同)하는 것이다. 갑이 표리부동하면 인심이 떠나고 후일 갑을이 바뀌었을 때 부메랑 되어 돌아온다. 갑은 가진 자이다. '있을 때 잘 해야' 하는 것이고 베풀 수 있을 때 베푸는 것이다. '가져야' 베푸는 것도 가능한 법이다. 그래서 갑일 때가 덕을 베풀고 인간을 사귀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갑질하면 갑질로 돌아오고 '갑짓' 잘하면 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