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乙)은 '칼날'을 잡은 편이다. 그래서 '칼자루' 잡은 갑(甲)의 통제 아래에 있다. 을은 '자원'을 관리하는 갑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야 하는 입장이다. '갑질'에 대응하는 의미로 '을질'이란 말도 있다. 이 '을질'을 사전에서는 "약자이지만 갑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을 생각하면 갑자기 주변이 서글퍼지는 느낌이다.  을도 언젠가는 갑이 될 수가 있다. 소위 먹이사슬 구조에 있어서는 한 쪽으로 을이면서 동시에 다른 쪽으로는 갑인 경우도 있다. 을로서의 경험은 인간을 보다 성숙하게 하고 후일에 갑이 되었을 때 좋은 '갑짓'을 할 수 있게 하는 토양이 될 수가 있다.  '을짓'을 잘 하려면 무엇보다 을로서의 근성이 중요하다.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과거에 갑이었다가 을이 된 경우에 갑으로부터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면 과거 갑 시절의 추억을 잊어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 긴다는 태도가 필요하다. 개같이 번다는 말처럼 갑의 가랑이 사이라도 기어가겠다는 자세로 매사에 임해야 한다. 또한 칼날 잡은 자가 조심(操心)을 하듯이 항상 조심(調心) 그리고 조신(調身)해야 한다.  중앙부처 실무자 시절에 약 5년간 갑이면서 을로서 일을 한 적이 있다. 국가 재정 분야에 있어서는 집중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었다. 수시로 재정관련 협의를 해야 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국가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예산부처에 협의를 하러 다녔다. 그러던 1990년대 초 어느 해 영속적으로 국비예산이 소요될 프로젝트 하나를 추진하게 되었다.  법률을 개정해야 하고 조직 윗선에서 관심을 크게 가지고 있는 사업이었다. 그 해 봄부터 정부 법률안과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될 때까지 약 40번은 예산부처에 드나들었을 것이다.  한 번은 당시 직속상관 K과장을 모시고 함께 예산부처에 갔다. 그 날 K과장으로부터 그야말로 '을로서의 모습'을 배운 적이 있다. 워낙 굵은 신규 국비 사업이라 당시 예산실 K국장은 설명자체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K과장이 통사정을 했으나 보고 받기를 거부하며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K과장이 한 마디만 들어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K국장은 도망가다시피 달아났다. K과장은 뛰어가 매달려 K국장의 다리를 뒤에서 껴안고 사무실 복도 바닥에서 질질 끌려갔다. 뒤따라가는 젊은 필자 눈에 눈물이 돌았다. 결국 K국장이 포기하고 사무실에 돌아와 설명을 들었다. 그 해 여름이 가고 가을 국회에서 그 예산 부수 법안은 통과되었다. 그 제도는 오늘날까지 전체 공직자 가족의 주요한 복지 항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공직생활 갓 5년을 넘은 필자는 그 때 그 K과장으로부터 평생에 을로서의 행동을 배웠다. 그래서 20여년 후에 부처 책임자로서 상급기관 조정회의에 갔을 때 끝까지 물고 늘어지자 따라간 오늘의 후배 실무자가 뒤에 배석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을로서의 '최악'의 행동은 '을질'을 하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거만'이 자리잡고 있다. 예전의 갑 추억을 벗어나지 못해 자신을 소개한답시고 과거의 지위나 상황을 갑 앞에서 떠들어 대는 것 등이다. 수년전 국회에 정기예산 협의를 하러 다니던 때였다.  소속 부처 간부 하나가 자기 나름대로 일조를 하겠다고 국회에 드나들면서 달리 잘 못한 게 아니라 본인의 경력을 들이대며 국회의원 누구와 친하다는 식으로 인사를 하고 다녔다. 그 때 국회 핵심 L수석은 본래 사람이 양반이었다. 그 마음 좋은 수석이 필자 앞에서 그 간부를 지칭해 "×만한 ×끼!"라고 했다. 그래서 그 간부에 대해 국회 금족령을 내린 바 있다.  을의 차악(次惡)의 행태는 갑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내는 것'이다. 답답하고 절망적이더라도 참아야 한다. 갑 앞에서 화내는 것은 이제껏 쌓은 탑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것과 같다. 섶을 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이 될 수가 있다. 을의 행동 계율에는 갑보다 주의해야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근원적으로 구하는 자로서의 근성이 부족한 것이고 을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을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어서 이럴 경우 실제 성취하는 바가 별로 없게 된다.  을은 을로서 성실해야 한다. '거만'은 언제나 '독(毒)'이다. 좋은 '을짓'은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으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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