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미국의 경제력을 앞질렀다고 자부한다. 중국의 개방 이전에는 '죽(竹)의 장막'이라고 불릴 만큼 매우 패쇄적인 국가였다. 예컨대 80년대 후반기 중국을 처음 여행했을 때 외국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화폐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태환권(兌換券)이라고 해서 일반 중국인들이 사용하던 인민폐(人民幣)와 다른 돈을 사용해야 했다. 달러를 환전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면 은행에서 태환권으로 바꾸고 태환권은 국가가 운영하는 호텔과 식당, 상점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간혹 암시장에서 태환권이나 달러로 인민폐를 환전하기도 했지만 위험했고 위법이었다. 당시 중국 국민들의 삶은 지금 설명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윈난성 쿤밍 국제공항의 대합실은 70년대 우리나라 시골 버스터미널 대합실보다 허술했고 공중화장실에서 풍기는 지린내가 온 공항을 뒤덮을 정도였다. 베이징의 호텔에는 저녁 8시 정도면 캄캄할 정도였다. 전력을 아끼려고 했는지 아니면 숙박객이 별로 없어서 그랬는지 프런트데스크를 제외한 로비의 전등은 모두 꺼졌다. 그래서 늦은밤 호텔은 마치 음험한 동굴같았다. 100달러 정도의 돈만 있으면 일주일 정도 편하게 쓸 수 있을 정도로 중국 화폐의 가치도 엄청나게 낮았다. 그만큼 물가가 싸고 기반시설이 미약했다. 경주시와 자매도시인 시안의 병마용갱은 당시 처음 개방해 허술했다. 병마용갱을 향하는 길목에는 중국의 전통 건축물들이 이어졌고 푸른색 인민복을 입은 국민들이 길가에 하릴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거나 곡괭이를 메고 들판으로 향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개방 이전의 중국은 그렇게 고요하고 허술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전벽해가 됐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50년 압축성장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성장은 그보다 속도가 빠르다. 개방 이후 갑자기 돈을 번 벼락부자를 그들은 '폭발호(爆發戶)라고 불렀다. 폭발호들은 갑작스럽게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했다. 외제 자동차를 사고 대저택을 지었다. 그리고 자녀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돈을 물 쓰듯 했다. 물론 이들은 정치적 특권계층에 많이 몰려 있었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성장하는 경제적 부유함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제적인 부를 누리기는 하지만 선진국 국민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유렵의 면세점은 그동안 일본인과 한국인을 겨냥한 상품과 판매전략을 세웠다가 얼어 전부터는 중국인들을 위해 모두 판을 갈아엎었다. 이제 면세점에서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기웃거리면 쳐다보지도 않는 상황이 왔다. 중국인들은 면세점을 누비면서 돈을 뿌리고 다닌다. 그들이 훑고 지나간 상점들은 과장하자면 펄적의 소설 '대지'에 나오는 메뚜기 떼들이 훑고 지나간 들판 같다. 그러나 이들은 예의범절이 없다.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푸아그라 전문 식당이 어느 날 떠내려갈 듯이 스끄러웠다. 그동안 품위 있고 점잖은 손님들이 조용하게 와인을 마시며 푸아그라를 음미하던 식당이 들썩거렸다. 손님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항의했다. 중국의 어느 보험회사가 상품으로 유럽여행을 내걸고 실적을 높게 올린 직원들을 여행시켜줬는데 그들이 그 식당을 점령한 것이었다. 아예 큰 식당의 잘번 이상을 통째로 점령한 중국인들은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질러댔다. 중국 여행을 하면서 버슬 라타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소음이다. 5히간 이상 타는 버스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한다면 그건 과욕이다. 앞뒤에 앉은 중국인들이 대화하는 소리는 거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싸우는 수준이다. 거기에 아이들은 버스 통로를 운동장에서처럼 뛰어다닌다. 도대체 공중도덕이란 이들에게는 없다는 투다. 제주공항이나 인천공항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중국인 여행객들이다. 중국인 단체여행객들은 공항 전체를 누비며 고성을 질러댄다. 더러는 자리를 펴고 앉아 음식을 먹고 떠드는 경우도 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이 광경을 보고 아무말 못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문제는 있다. 중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멀고 험한 길이 남았다. 공중도덕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나라의 국민들이 도대체 어떻게 선진국에 도달하겠는가. 대국이라고 자칭하면서 아직 국민성 하나 제대로 간추리지 못하는 나라의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