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경영학과를 선택한 것은 지금껏 제가 선택한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탄탄한 수업 내용도 좋았지만 늦은 나이가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 교수·학우들 모두 저에게 너무 잘해줬다" 영남대 경영학과에 68세의 늦은 나이로 입학, 회사가 있는 충북 괴산에서 2시간 30여분에 걸쳐 단 한 번의 지각이나 결석 한 번 없이 매일 같이 통학한 김영자 청성산업 대표는 지역을 넘어 모든 대학생들의 귀감이다. 더군다나 김 대표는 비슷한 또래는 물론, 젊은 청년들도 힘들어 할 이 같은 배움의 과정을 한 손이 없는 장애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실천에 옮겨 고개를 절로 숙연케 만든다. 하지만 김 대표는 오히려 기자의 놀라움에 의아한 모습을 보였다. 배우겠다는 열의가 있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거리 역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김 대표는 "교수님의 명강을 들을 생각과 자신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손자·손녀뻘 되는 학우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오히려 즐겁기만 했다"면서 "물론 몸이 따라주지 않다보니 많이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 울면서 학교를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 포기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 영남대 훌륭한 강의 "평생 동안 남을 교훈" 충북 청주가 고향인 김 대표는 경상도 출신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청주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경북 경산 출신의 남편을 유독 맘에 들어했다는 친정 엄마는 사출 일을 하는 남편을 두고 "기술이 있으면 평생 굶고 살지는 않는다"며 김 대표를 설득했고 그렇게 결혼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이후 그녀가 사업에 뛰어들 게 된 것은 남편의 권유 때문이었다. 회사를 차린 남편이 사무를 봐달라고 부탁했고 작은 일서 배운 것이 어느덧 회사의 모든 운영을 맡고 있는 자신이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같은 과정은 지금의 장애를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김 대표가 운영하는 청성산업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사출회사다. 사출 공정은 PC 원료를 녹여 금형을 통해 제품을 찍어내는 회사로, 당시 물량이 급하다는 거래처의 부탁에 3일 밤낮을 일에 몰두 한 것이 화근이 됐다. 졸면서 일을 하다 왼 손이 사출기에 끼어 지금의 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김 대표는 이후 두 달 가까이를 죽음만 생각했다고 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왼 손의 보이지 않는 형체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고 삶에 의욕마저 잃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갖게 된 장애는 지금의 김 대표는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 대표는 "많은 거채처에서 회사에 나와만 달라고 계속 부탁해 회사에 나갔는데 그때 회사에서 일하던 미성년자가 회사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갔다"며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만 일을 할 수 있는데 그 사건 때문에 아버지가 회사로 찾아 왔는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양손이 모두 없는 것이었다. 오랜 대화 끝에 월남전에서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일이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삶의 의욕을 되찾은 것 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보다 나은 회사경영을 위해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했고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영남대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명문 학교라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이 대학 경영학과의 질 높은 수업 방식을 주위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남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 대표는 입학 첫 날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회사에서 일하고 2시간 30여분을 운전, 학교 수업을 받는 과정을 졸업할 때까지 매일 같이 해왔다. 이것만이 끝이 아니다. 수업을 마친 뒤 집이 아닌 다시 회사로 돌아가 나머지 업무를 끝마쳤다. 김 대표는 "일반 청년들도 힘들어 할 하루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힘든 적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을 존경해하는 교수님과 학우들의 눈빛이 생각날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며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운영시스템에 도입하니 예전보다 생산량이나 직원들의 피로도가 확실히 개선됐다. 정말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한 일이었다"고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지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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