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5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 사건과 관련, 법원이 22일 오후 사상 처음으로 총리공관에서 진행한 현장 검증이 3시간 만에 완료됐다.
한 전 총리는 이날 오후 1시45분께 도착해 본관 문 앞에서 차에서 내린 뒤 "오랜만에 왔다"고 말하며 먼저 공관 앞 정원 둘러봤다. 검찰은 이에 앞서 오후 1시30분께 가장 먼저 도착했고,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는 15분 뒤인 1시55분 도착했다.
이밖에 당시 공관관리팀장 최씨, 수행비서 강씨, "한 전 총리가 재임시절 손님들보다 늦게 오찬장을 나온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발언한 경호원 윤씨, 검찰이 증인으로 신청한 경호팀장 최씨와 경호원 정씨 등이 참석했다.
리모델링 등을 통해 모습이 바뀐 총리공관 오찬장은 한 전 총리과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 등이 오찬을 가진 당시와 같게, 테이블과 의자 등의 배치를 복원해 둔 상태였다.
검증시작에 앞서 검찰과 변호인은 경호원 윤씨를 지난 주말 검찰이 추가 조사한 것과 관련해 신경전을 벌였다.
검찰은 "처음 조사한 것과 법정 증언이 너무 상이해 진술 경위에 대한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위증인지 여부에 대해서 조사했다. 조사 내용과도 다르고 다른 경호원의 진술과도 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변호인은 "검찰에서 진술과 법정 증언이 다른 증인은 매우 많았다"며 유독 윤경호를 조사한 이유를 따졌다. 또 "이 부분 공방은 공판 기일에서 하겠다"고 밝혔다.
현장검증인단은 주차장에서부터 진입경로, 행사 종료시 차량 대기 위치 및 출발 지점을 확인했다. 각 이동거리는 검증을 마칠 때 일괄해서 재기로 했다. 이무렵 현장에 비가 내리기 시작해 검증작업은 비를 맞으며 진행됐다.
변호인은 오찬장 주변 상황에 대해 "창문을 통해 정원 또는 현관 앞 도로에서 오찬장 내부가 보인다"며 "정원에 돌의자, 돌탁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굳이 정원이나 도로로 나와 내부를 들여다 볼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검증인단은 현관으로 진입해 현관 크기, 한번에 이동할 수 있는 사람 수를 확인해 본 뒤 부속실 내부 검증에 들어갔다. 변호인은 각 단계에서 현장 상황이 제출한 도면과 유사하거나 일치하는지를 증인들에게 확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전 공관관리팀장 최씨는 "수행비서 강씨가 대기했는데 복도에 놓인 소파의 크기는 이전 것과 비슷하지만 위치는 현재보다 벽쪽으로 더 붙어야 하며 당시에는 소파의 갯수도 더 많았다"고 설명했다.
소파의 종류가 바뀌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검찰과 변호인, 양측의 이견 없었고, 소파가 있던 곳 주변은 중간에 리모델링이 이뤄져 일부 구조가 바뀌었다.
이어 전 수행비서 강씨가 평소 대기할 때 앉는다고 한 지점에서 오찬장 문까지 줄자로 거리를 측정, 7m거리임을 확인했다. 참석자 중에 한 명이 오찬장 문을 열고 나오는 역할을 하면, 강씨가 이를 보고 있다가 오찬장 앞으로 다가가는 장면도 재연했다.
이때 검찰이 "강씨가 수행가방 등 짐을 챙겨야 한다"고 주장, 강씨가 손가방 등을 챙겨서 재연하고 시간을 재니 4.5초 내외가 나왔다. 이어 재판부는 전 공관관리팀장 최씨에게 당시 소파의 위치에 의자를 놓으라고 지시했고, 이 경우 강씨가 다시 오찬장으로 가는 시간은 5초 가량 걸렸다.
여기서 변호인은 "오찬장 문 앞과 거실에 놓인 소파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할 때 들리는지를 확인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양 지점에서 '가나다라'를 나직한 소리로 말하고, 이 소리가 양쪽에서 들리는지를 확인한 결과 현장기자들에게도 그 소리가 확인됐다.
변호인은 이어 "소파에서 오찬장 입구가 잘 보인다"고 주장하며 한 전 총리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곽 전 사장에게 돈봉투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시사했다.
이번에는 전 경호원 윤씨가 법정에서 증언한 것과 같이 오찬장과 복도로 통하는 문을 주먹하나 정도 크기로 열어두는 것을 재연했다.
검찰은 전 수행비서 강씨가 법정에서 '이 문을 닫아두며 딸깍소리를 듣고 일어선다'고 한 것과 관련해 문이 주먹크기로 열려 있을 때와 닫혀 있을 때 소리가 각각 어떻게 다른지 시험했다.
또 검찰은 경호팀장 최씨에게 "문이 열릴 때 어디에 경호팀장이 어디 있는지 보여달라"고 요청, 최씨는 부속실 앞에서 섰다.
이때 변호인은 최씨의 위치에서 열린 문을 통해 오찬장 내부가 보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음은 검찰이 준비한 2만달러와 3만달러가 든 봉투 2개를 곽 전 사장의 설명에 따라 참석자가 의자에 꺼내놓는 장면을 재연하고 시간을 쟀다. 3만달러가 든 봉투의 높이는 3.2㎝, 2만 달러 봉투의 높이는 2.6㎝였다.
오후 3시45분부터는 한명숙 전 총리,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본격적으로 참여해 오찬장 당시 상황을 재연했다.
오찬장 테이블은 흰색 보로 덮여있고, 의자는 4개. 옅은 갈색, 진한 갈색 섞여있었다. 등받이는 약 60㎝였고, 받이 아랫부분은 5㎝정도 뚫여있는 의자였다.
먼저 변호인은 "양복은 단추 2개 있는 걸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 조건에 맞는 양복을 입은 변호인측 사람이 곽 전 사장을 재연했다. 이무렵 변호인이 "곽 전 사장의 키는 170cm"라고 말하자, 검찰은 "(키가) 그 정도가 안 되는데"라고 말하며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우선 곽 전 사장은 봉투를 하나씩 꺼내 의자에 두며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이때 재판부가 "겹쳐서 (봉투를 뒀는지) 아니면 일렬로 해 식탁 방향으로 뒀냐"고 물었고, 곽 전 사장은 "테이블 방향으로 해서 겹치지 않게 뒀다"고 상세하게 답했다.
변호인이 곽씨가 돈 봉투를 두고 오찬장 문 밖으로 나가는 상황을 재연하는 데 15초가 걸렸다. 변호인이 한 전 총리의 위치를 묻자 곽 전 사장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총리님이 좀 늦게 나왔다"고 답했다.
변호인이 "어느 정도 차이(가 나게 나왔냐)?"고 다시 묻자 곽 전 사장은 "정확하게는 잘…"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변호인이 "(한 전 총리가) 따라 오는 소리 들었나?"라는 질문에도 역시 곽 전 사장은 "기억이 잘…"이라며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에 검찰은 실제 걸어보면서 "카펫이 두꺼워 소리가 안 난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 실제로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옷이 구겨지는 소리 정도만 들렸다.
이후에는 검찰이 상황 재연에 들어갔다. 노만석 검사가 한 전 총리 역할, 이태관 검사가 곽 전 사장 역할을 했다. 나머지 2명은 정세균 장관과 강동석 전 장관 역할을 맡았다.
먼저 한 전 총리 역의 노 검사가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인사를 하며 일어났고, 그 사이 장관 역의 2명이 나갔다. 이어 곽 전 사장 역의 이 검사가 돈 봉투 2개를 꺼내면서 뒤따라 나갔다. 테이블에 봉투를 두자 마자 한 전 총리 역의 노 검사가 이를 챙겨 테이블 뒤에 있는 서랍장 왼쪽 제일 위 서랍에 넣고 뒤따라갔다.
공관 현관까지 걸어가면서 한 전 총리 역의 노 검사는 장관 역할의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잡은 뒤 "잘 들어가세요"라고 인사했다.
이를 지켜보던 한 전 총리는 옆 사람에게 "나는 저 서랍 쓴 적도 없는데…"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검찰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3번 반복재연했다. 김형두 부장판사가 안에서 지켜볼 때 한 번, 문밖에 나가서 문에서 나오는 장면을 지켜볼 때 한 번, 또 현관 앞에서 지켜보면서 한 번 재연했다.
3번의 재연이 끝난 뒤 검증단은 다시 오찬장 들어가 한 전 총리가 돈을 챙기고, 곽 전 사장이 이를 보는 상황을 연출했다. 이에 권오성 부장검사는 "곽 전 사장은 못봤다고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아니다, (곽 전 사장이) 못 봤다고 했다"고 반발해 또 설전을 벌였다.
이후 문이 열린 상태에서 서랍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번 더 재연이 진행했다. 검찰은 이 시범을 보이기 위해 김형두 부장판사를 문이 열린 상태에서 밖에서 대기하게 했다.
검찰이 보인 시범에서는 '드르르륵'하고 소리 들렸지만, 변호인측 시범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에 김형두 부장판사가 웃음을 보였고, 한 전 총리는 옆 사람에게 "서로 다르네"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한 전 총리는 오찬장 안에서 팔짱 낀 채 미소를 보이며 현장검증을 지켜봤다. 때로 뒤로 돌아서 내리는 눈을 보면서 "눈이 정말 많이 내리네요. 좋은 날이네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변호인은 곽 전 사장에게 오찬장에서 한 전 총리가 뒤따라오는 것 알았는지 질문했다. 곽 전 사장은 "조금 차이가 났고, 한 전 총리가 따라 나왔다. 오는 것을 알 정도였다"고 대답했고, 3시간 만의 현장검증이 마무리됐다.
한 전 총리에 대한 8차 공판은 24일 오전 10시30분 서울중앙지법 311호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