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에 힘입어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이후 항주-장사-유주-중경에 이르기까지 일곱 번 거처를 옯겼으며,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한인 동포들은 에니깽 농장 등지에서 힘들게 번 돈으로 성금을 모아 독립자금으로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살림이 어려운데, 아버지가 꼬박꼬박 무슨 돈을 내더라.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고국의 독립 성금이었다’상해, 장사, 중경 임시정부에 간 적이 있다. 상해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 ‘신천지’ 내에 있다. 아! 허름한 이층집, 삐걱대는 낡은 계단에 태극기가 걸려있는 여기가 대한민국 정부였던 것이다. 그나마 장사임시정부는 재계발구역으로 철거 대상이었고, 중경에서는 문이 닫혀 입장도 못했다. 중경에서 광복을 맞은 임시정부는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 ‘경교장(京橋莊)’에 머물며 첫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경교장은 임시정부 청사가 된다.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이봉창 의사(당시31세)의 일왕 폭탄 투척 거사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의 일본 전승 기념행사에 윤봉길 의사(당시24세)의 도시락 폭탄 투척 거사를 기획했다. 이봉창 의거는 일왕이 황군 열병식 참석 후 궁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노렸는데, 아쉽게도 두 대의 마차 중 일왕이 타지 않은 마차에 폭탄을 던져 거사는 실패한다.그러나 이 일은 4개월 뒤 윤봉길 의거로 이어진다. 청년 윤봉길의 일화는 남아있다. 거사일 아침을 같이 하고 백범이 윤봉길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못올 길을 가는데 왜 그리 웃는 얼굴인가?” ‘-“제가 나라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선생님 시계를 보니 다 낡았고, 제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새 것입니다. 제게 시계는 이제 한 시간 밖에 필요가 없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죠!” 둘은 회중시계를 교환하고 이후 백범이 간직하던 시계는 후손을 통해 예산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전달된다. 일제는 김구에게 내건 현상금을 20만 위안에서 60만 위안까지 올렸다. 현재 한화로 계산하면 200억원 정도. 미국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비행기를 매입해 일본 본도를 폭격하려던 임시정부는 갑자기 해방을 맞게 된다. 김구는 상하이에서 귀국하는데,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주석이 아닌 일개 개인으로 귀국시킨다.이 날 환국 전 상하이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꽃다발 목걸이를 한 김구, 눈물을 닦고 있는 성재 이시영, 김구 앞 태극기를 든 소년 이종찬. 참으로 역사적인 사진이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손자로, 육사를 나와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광복회장으로 있으며, 5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걸 변호사의 사촌형이다.타국에서 그토록 일제에게 쫓기던 백범은, 고국의 청년에게 암살되고 만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주한미군방첩부(CIC) 요인인 한국군 소위 안두희는 백범을 암살한다. 당시 배후로는 라이벌이던 이승만이 거론되었으나, 현재는 미군정이라고 남아있다. 당시 ‘LIFE’ 지에 실린 총탄이 관통한 유리창과 그 너머로 흰옷 입은 국민들의 통곡하는 사진은 전 세계로 보도된다. 실제 미군정은 ‘Black Tiger’라는 암호명으로 백범을 가장 위험 인물로 보았다. 일개 소위이던 안두희가 민족지도자인 백범을 단독으로 암살할 수도 없고, 실재로 의기양양하게 체포된 그는 황제 수감 생활을 한다. 진술에서 그는 열혈우익단체 ‘서북청년회’ 단원이라고 했다. 그는 수감 1년이 못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혼란을 틈타 사라진다. 아직도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미궁이다.안두희는 은둔 생활로 칩거했지만, 강원도 일대의 연못에 배가 있는 대저택에서 호화 생활을 한다. 그가 세간에 나온 건 1996년 10월, 인천 자택에서 ‘정의봉’이라고 쓰여진 곤봉에 맞아 피살되어서였다. 그는 이미 팔십 노구였으나 그를 추적한 버스 기사 ‘박기서‘는 나무 방망이로 폭행해 살해했다. 그는 ‘국부를 시해한 사람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3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98년 3.1절 특별사면으로 1년 4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해방을 맞았으나, 사회는 민족간의 좌우 대립과 암살이 이어진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달라졌을까? 이번 대통령 탄핵 찬성과 반대 시위를 보면 세상은 아직도 그대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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