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유죄와 무죄의 구분이 있을 뿐 비김은 없다. 때문에 피고와 원고는 늘 천국과 지옥의 극단적 갈림길에 서게 되는데,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나무망치를 든 사람들의 성향과 주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빈대떡 뒤집히듯 할 수 있다면, 신의 영역마저 뛰어넘는 듯 한 그런 결정을 과연 누가 수긍할 수 있을까?나는 늘 우리가 만든 사법제도 중에 검사의 '기소 편의주의'나 '검사 동일체 원칙'등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최근의 특정 재판 결과를 보면서, 사람의 운명을 재단하는 최후의 결정권이 주어진 재판관들 또한 '판결 편의주의' 내지 '판사 동일체 원칙'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한낱 종이 조각에 불과한 지폐가 그 종이에 인쇄된 액면에 따른 재화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이유는 명백한데, 공동체의 약속으로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부여한 무형의 신용을 수치화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마찬가지로 공직자가 가지는 권위와 권한은 무신불입(無信不立, No one can stand up without trust)이라는 동서고금의 원칙처럼, 오직 소속된 구성원들의 신뢰에 의해 성립되는 한시적 권력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개인의 정치적 운명은 물론,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재판이, 배당된 재판부에 따라 유죄에서 무죄로, 또 무죄에서 다시 유죄로 빈대떡 뒤집히듯 하는 것을 보면서, 어느 누가 이러한 사법 결정을 신뢰할 것인지 모르겠다.물론 법관 역시 신이 아닌 사람으로, 실수가 없을 수 없기에 번거로운 삼심제(三審制)를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재판의 결과가 그렇게 쉽게 뒤집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삼심제가 아니라 오심제(五審制)나 육심제(六審制)를 시행한들 누가 그런 재판 결과에 순순히 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인류가 문자를 가진 이후에 공동체의 약속을 굳이 성문화(成文化)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을 배제함으로써 좀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룰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법관은 이미 정해진 룰만 집행할 권한을 공동체로부터 위임받고 있을 뿐, 스스로 새로 룰을 만들거나 혹은 정해진 룰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된다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근 판결문에 '그렇게 해석된다'거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법은 주관인가? 객관인가? 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즉, 법관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한 성문법이란, 마치 물리학자에 따라 달라지는 물리법칙과도 같고, 보는 이에 따라 액면가가 달라질 수 있는 지폐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기소편의주의 권한의 검사들이 범죄 피의자를 불기소 처분하고 싶을 때, 가장 많이 쓰는 이유 중에 하나가 '법리 해석의 오류'나 '증거 불충분'으로 알고 있는데, 원심을 뒤집는 상급심에서, 판결 번복의 이유로 들고 있는 '원심의 법리 오해'라는 표현은, 소위 재판관이란 사람들이 정확한 법리도 모른 채 재판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자인한 것으로 보이기에, 그것은 원심 재판관들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 사법부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함부로 원심 파기 이유로 사용될 어휘는 아니라 생각되며, 상급심은 당연히 좀 더 충분한 심리를 통해, 행여 원심 판결의 오류 부분이 있는 지를 면밀히 살펴야 옳지 않았을까?재판부의 빈대떡 재판이나, 특정 정당의 호떡 공천이나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결정이 조석지변(朝夕之變)함으로써 이렇게 희화화 되어도 되는 것인지를 묻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