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텍 의과대학은 단순한 지역 사업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한 플랫폼입니다.”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이강덕 포항시장이 던진 이 한마디는 단순한 지역자치단체장의 홍보성 발언으로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는 의료의 미래를 향한 절박함과 전략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2027년. 대한민국 의료정책의 중대 분기점이 될 해다. 정부는 이때 의대정원을 대폭 확대할 방침이다. 수십 년 묵은 의사 수 논쟁에 다시 불이 붙는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묻히고 있다. “의사만 늘려서 과연 미래가 보장될까?”포항이 던지는 화두는 다르다. 의대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의사과학자(MD-PhD)’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팬데믹은 단순 진료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데이터를 읽고, 신약을 설계하며, 기술을 해석할 수 있는 융합형 의사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그런데, 한국에 그런 기반이 있나? 답은 부정적이다. 미국은 하버드, 스탠퍼드, MIT 등에서 MD-PhD 트랙이 보편화됐지만, 한국은 이름뿐인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교육과정은 낡았고, 인프라도 미비하다.그 틈을 포항이 파고들고 있다. 방사광가속기, 극저온 전자현미경, 세포막단백질연구소 같은 세계급 R&D 자산이 도시 전체에 깔려 있다. 포스텍은 이미 융합대학원에서 의과학 전공을 운영하며 시범운행 중이다. 여기에 의대를 얹겠다는 구상이다.의료·과학·산업이 만나는 접점을 만들겠다는 의도다. 단순히 병원을 짓겠다는 게 아니다. 치료만이 아니라 기술을 설계하고 산업을 키우는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다.더 놀라운 건 ‘의지’다. 포항시의회는 의대 설립 지원 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지역 병원들과 공동 MOU를 체결했으며, 시민 30만 명이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지자체, 정치권, 학계, 시민이 동시에 움직이는 곳은 포항이 유일하다.반면, 수도권 대학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기존 의대와 병원 중심의 구조에 균열이 생기는 걸 반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구조야말로 한국 의료의 한계였다는 사실을, 지난 3년이 똑똑히 보여줬다.2027년은 단순한 숫자의 싸움이 아니다. 포항의 모델은 실험적이다. 그러나 그 실험이 성공한다면, 한국 의대의 패러다임은 단순한 ‘정원 확대’에서 ‘정책 혁신’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국가전략이란 말은 늘 쉽게 쓰이지만, 진짜 전략은 누구의 입이 아니라 누가 먼저 실천하는가로 증명된다.포스텍은 기존의 의과대학 모델에서 벗어나, 연구 중심 생태계를 먼저 구축하고 의대를 그 위에 얹겠다는 발상이다. 연구소가 대학을 품고, 병원이 기술을 실험하며, 학생은 연구자로 성장하는 구조다. ‘의대=병원+강의실’이라는 공식에 익숙한 기존 시스템에선 낯선 그림이다.하지만 그렇기에 주목할 만하다. 지방 소멸, 의료 양극화, 바이오 주권이라는 한국 사회의 세 가지 불안을 동시에 겨냥하는 실험이기 때문이다. 포항이 만드는 이 ‘의사과학자 플랫폼’은 단순한 지역의 도전이 아니라, 대한민국 의료정책의 다음 30년을 가늠할 시금석이다.관건은 정부의 선택이다. 정원 배분이라는 숫자 싸움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 보건·산업의 미래를 설계할 것인가. 서울이 익숙한 길을 고집한다면, 변화는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변방이 때론 중심보다 더 멀리 본다. 지금 포항이 그렇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