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권력자의 마지막도 극적이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그는 시해되었다. 때는 ‘부마항쟁’으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10월 16일 부산대생 시위로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자, 시위는 마산까지 확대되었다. 오른팔이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시위대를 탱크로 쓸어버리자고 했고 왼팔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시라’고 했다. 박정희 만큼 공과가 극명한 이도 없는 듯하다. 그는 나라를 경제성장 시킨 인물이나 18년 장기 집권한 독재자였다. 결국에는 ‘熙 빛날 희’ 자의 점 네 개처럼 총탄을 맞고 사라진다. 국장으로 치러진 그 날의 장례식에서 영정이 실린 영구차가 거리를 지날 때 소복 입은 여인들은 유족이나 된 듯이 통곡했다. 그때는 하늘이 무너진 듯했다.제7대 대선에 박정희와 같이 입후보한 김대중과 야당인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가 가장 싫어한 정적이었다. 1979년 8월 9일 YH 사건 때 김영삼이 신민당사로 여공들을 피신시켜주자 박정희는 경찰을 투입하고 그를 가택연금 시킨다. 이 사건은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을 촉발한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거제도 사내 김영삼(1927~2015)은 말한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의 어록은 이번 선거에도 회자 될 만큼 ‘촌철살인’ 이다.김대중(1924~2009)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맞붙는데 의외의 약진으로 불과 95만 표차밖에 나지 않자 박정희는 이듬해 유신을 선포한다. 김대중은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그가 탄 승용차와 대형 트럭의 교통사고(1971), 도쿄에서의 납치 사건(1973), 광주 내란 음모 사형 선고(1980)를 거친다. 그로 인해 그는 다리를 절게 되고 2년 6개월의 감옥 생활, 3년간 망명을 겪는데, 이후 ‘인동초’라는 별명을 얻는다. 김종필(1926~2018)은 1961년 5.16 군사 정변의 중심인물로 박정희의 조카인 ‘박영옥’과 결혼(1951)해 그의 조카사위가 된다. 중앙정보부장, 국무총리, 공화당 총재를 거쳐서 다들 후계자로 여겼다. 박정희도 ‘나 다음엔 임자가 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은 말뿐으로 그는 늘 2인자로 처신해야 했다. 필자는 생전 그가 모 일간지에 실은 회고록 ‘소이부답 (笑而不答): 웃고는 답하지 않는다’를 보았는데 지난 날짜까지 정확해 기억력이 대단하고 회화, 서예 등 예술적 소양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그 시절 三金은 무게감이 상당했다. 상도동계, 동교동계 하면 연대감이 대단하고 전담하던 기자가 따로 있어서 그들의 동향은 다음 날 조간신문에 바로 보도됐다. 그들의 이니셜인 YS, DJ, JP가 그만큼 존재감 있는 사람은 없다. 6. 29선언을 통한 대통령 직선제로 1987년 대선은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됐다. 이때 신민당 김영삼 633만 표(28%), 평민당 김대중 611만 표(27%),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182만 표(8. 1%)를 득표했다. 양 김이 단일화했더라면 828만 표(36.6%)를 득표한 민정당 노태우 후보를 누르고 우리 나라의 군인 정치 시대를 앞당겨 끝내지 않았을까? 라이벌이던 양김은 서로 멀어져 DJ가 죽기 전 YS가 투병 중인 DJ를 찾아가 화해를 청했는데 그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三金의 두 사람은 차례로 대통령을 하고(김영삼, 1993~1998, 김대중, 1998~2003), JP는 총리를 두 번(1971~75, 1998~2000) 역임한다. 생전 DJ에게 YS를 평해 달라고 묻자 YS는 어려운 일을 쉽게 결단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 그는 시기에 맞는 정치적 판단력이 대단했다. 말하자면 감각적이었다. 취임 초기 문민정부를 맞아 그의 지지율은 90%에 달했다. 이에 그는 금융실명제나 하나회 척결 같은 개혁 작업을 하고 ‘역사 바로세우기’로 조선총독부 해체, 남산 아파트 철거 등을 시행한다. 반면 DJ는 논리적이었다. 꿋꿋한 인내심, 지적 탐구, 세계적인 인맥, 정치적 핍박과 모함을 받았음에도 끝없는 포용 등이 장점일 것이다. 대선 토론 때 한 패널이 당시 일흔셋이던 그의 나이에 대해 질문을 하자 그가 한 대답이 생각난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어느 만큼 생각을 젊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답을 했다. 우리는 김영삼,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카리스마 지닌 민주화 주역 대통령을 거치게 됐다. 이번 선거를 보면 더불어민주당이 중도를 자처하며 보수 정당 같이 보인다. 실제로 후보자는 이승만, 박정희 묘역까지 참배하며 선거전을 시작했다. 한편 국민의힘은 탄핵당한 대통령을 비호하며 극우정당으로 비치고 있다. 이제는 민주노동당이 진보로 보인다. 진보와 보수는 고정된 정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대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국민을 통합하는, 성공하는 대통령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