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맑고 아름다운 곡이다. 경쾌한 바이올린 소리가 톡톡 벙그는 꽃망울 또는 산새들 날갯짓을 닮았다. 마지막 부분의 톡톡 피치카토 소리는 꽃 피고 새 우는 들판에 서 있는 듯 진짜 봄 같다. 들을수록 명랑한 느낌 때문에‘바이올린 소나타 5번 F장조' 라는 이름보다 ‘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작곡한 흐느끼는 듯 속삭이는 듯 음색이 알프스 가문비나무 바이올린의 연주를 듣는 것처럼 환상적이었는데…
앙스트 블뤼테(Angst blüte)가 생각난다. 앙스트는 공포와 불안을, 블뤼테는 만발 혹은 개화를 뜻한다.‘불안 속에 피는 꽃’이다. 300년 전 알프스의 가문비나무 군락에서는 나이테가 촘촘해지는 기현상이 생겼다. 이탈리아의 스트라디바리 가문에서 그것으로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최고 경매가 약 172억 원)을 만들었다. 아무리 넓은 연주회장에서도 무한 울려 퍼지는 천상의 악기로 정평이 나 있다.
앙스트 블뤼테는 식물학적 용어로, 생존의 위협을 느낄 경우 더 많은 열매를 달면서 유전자를 남긴다. 가까운 숲에서 실제로 목격한 일이었다. 들어가면 솔 내가 물씬 풍겼다. 하늘을 찌를 듯 아름드리나무와 잔솔나무, 선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도 있다. 볕 좋은 날이면 워드 작업을 하고 음악을 듣는 아지트였다. 번화가로 바뀌면서 한동안 발길을 끊었는데 오늘 모처럼 본 소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푸르렀던 것.
물소리 새소리만 듣다가 자동차 매연에 시달렸으리. 그런데도 훨씬 푸르고 솔방울까지 다박다박하다. 극도의 불안 끝에 씨앗이나 많이 달아야지 했겠다. 빙하기 특유의 차가운 날씨에서 유일한 성장 요소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심과 두려움이었기 때문에.
대나무도 번식이 힘들면 꽃을 피운 뒤 죽어버린다. 우리 집 야생난도 10년 만에 딱 한 번 피고는 말라 죽었다. 진짜 꽃 범벅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원 없이 피는 죽음의 꽃이었을까. 최악의 순간에 죽음의 신과 겨루면서 역발상적인 절정을 꿈꾼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의 집념이 아름다운 선율로 재생된 것처럼.
멧새가 삐루루 울어쌓는다. 베토벤의 또 다른 교향곡 전원을 듣는다. 봄 소나타 이후 만들어진 곡이었다. 2악장에 나오는 꾀꼬리(플롯)와 뻐꾸기(클라리넷) 메추라기(오보에) 등의 노래가 어찌나 정겨운지 숲속에서 직접 듣는 듯하다. 목가적 분위기가 물씬한 음악에서 인간이 자연을 만났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곤 한다.
작곡에 몰두하다 보니 청력이 약해졌다. 휴양 차 공기 좋은 시골 마을로 내려갔으나 호전되지는 않았다.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고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전원적인 풍경에 반했다. 신은, 소리를 빼앗아간 대신 새로운 음역을 만들어 주었다. 특별히 4악장에서는 더블베이스, 팀파니, 피콜로가, 바람과 천둥 번개 소리를 만들었다. 태풍이 낟알을 익히듯 전원생활을 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 명곡 탄생의 계기가 되었으려나?
그의 소리는 귀에도 악기에도 없었다. 보다 깊은 소리의 근원은 따로 있었는지 절망 속의 회로를 통과하면서 풍부해졌다. 시냇물 소리와 작은 새 노래를 풍경에 베껴 적는 방법이다. 청력이 온전했을 때 들은 소리의 재생이지만 진짜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처럼 표현이 놀랍다. 숲속에 있으면 그냥 기쁘고 행복했겠지. 두 편의 명곡은 즉 알프스 가문비나무가 만든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과 영감을 받아서 작곡한 열정의 아우름이었다.
앙스트 블뤼테는 절망의 골짜기에 뜨는 무지개였을까. 그게 곧 죽음을 눈앞에 둔 소망의 표현이라면, 전원 교향곡은 소리의 부재 위기와 하일리겐게슈타트의 전원풍경이 모토가 되었다. 극도의 절망이 지친 영혼을 깨운다. 베토벤은 전하고 싶었던 거다. 자신의 앙스트 블뤼테는 전원 교향곡이었다면서. 최악의 순간은 위대한 출발선이라고 했으리. 음악가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청력의 상실에서도 소리로 예쁘게 다듬었으니.
한 그루 나무의 지혜가 무궁무진하다. 우리 마을 야산은 솔방울 주렁주렁한 소나무 숲이 되고 알프스 산골짜기 나무는 명품 악기의 소재로 태어났다. 가물 때는 뿌리를 키우고 햇살이 부족하면 가지를 틀었다. 잎이 떨어지고 시드는 동안 소망의 우듬지가 보였다. 삶과 죽음이 엇갈릴 때마다 본능 이상의 지혜를 키우면서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죽음으로의 행진에서 모두를 잃었지만, 희대의 바이올린을 보면 잃은 것 이상의 수확이었다.
베토벤도 불안 속에서 음악을 꿈꾸었다.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할 즈음부터 소리는 자꾸 멀어졌다. 똑같은 명곡이라도 그때까지의 곡은 엄숙하고 웅장했었다. 영원히 듣지 못하게 될 공포 때문에 밝고 화사한 이미지로 바뀌었겠지. 인생 교향악에도 특별 작곡법은 있었다. 누구든지 전성기는 가장 힘들 때였다. 평범한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고난보다 더한 게 있으랴.
앙스트 블뤼테의 요람을 찾아가 본다. 지붕이 날아가고 창문은 부서지고 휴식은 깡그리 사라졌다. 애착이 없다 보니 깊은 밤 뜨는 별과 창가를 비추는 달이 더 친근해졌다. 따스한 들판이 생각나고 푸른 하늘의 새가 더 절박했으리. 눈먼 자에게는 고요한 밤이 차라리 휴식이었던 것처럼 소리가 차단된 그에게는 풍경이 오히려 편했다. 들리지는 않지만, 기억을 거슬러 가면 훨씬 다듬어진 소리로 재생되었을 테니.
절망의 낭떠러지 핀 앙스트 블뤼테는 위기일수록 깊은 내공을 자랑한다. 정상 기온을 되찾으면서 세기말적인 악기도 더는 태어나지 않았으나 고난의 스피커를 통과한 울림은 산 메아리처럼 해맑다. 바람 모지 산 중턱은 악몽이었지만 그때의 하늘은 더 푸르고 별도 예쁘게 반짝일 거라면서 오히려 애틋한 추억이 되었으리.
오래전의 알프스 정경이 떠오른다. 뼛속까지 추운 날씨는 고산지대의 나무라도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산은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울부짖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나무는 성장을 최대한 늦추면서 하늘을 키웠다. 고난의 언덕에서 잔뜩 웅크린 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온 바람 나무 일대기였다. 어둠만이 하늘의 별을 새기듯 고난으로만 인생을 말할 수 있을 거라 했겠지.
끝내는 밀도가 일정해지면서 특별한 나무로 자랐다. 수많은 나무의 눈물이 고난의 산맥에 물결치면서 절묘한 소리 바탕으로 남았다. 죽음의 신과 겨룰 동안 눈물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멜로디를 키웠다. 온종일 듣다 보면 꿈속에서도 들리던 그 선율. 얼마나 혹독한 바람이면 고난의 바이올린에서 눈물의 승화되었다. 앙스트 블뤼테의 회전축은 불안이고 뿌리심은 고난이라고나 하듯.
해거름이 되었다. 지는 해가 어찌나 강렬한지 수많은 차량이 뽀얗게 보인다. 솔숲에서 나와 건널목까지 내려갔다. 눈도 뜨기 힘든 빛 때문에 길은 돌아갔으나, 마지막 타오르는 촛불의 회광반조回光返照가 참으로 감동이다. 나무는 물론 서산마루 지는 해까지도 눈부신 환상을 꿈꾼다. 소망은 끊기고 행복의 전원이 차단될 때도 내일을 꿈꿔야 하리. 퍼내고 또 퍼내도 머르지 않는 옹달샘처럼. 앙스트 블뤼테는 절망의 섬을 비추는 등불이었으니까.
앙스트 블뤼테의 꼭짓점에는 고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길이 험하고 산이 높을수록 가슴 뛰는 날들이겠지? 힘들어도 꽃을 피우는 기회가 된다. 뜨거운 가마에 들어간 그릇은 빛바래지 않는다. 영광은 상처의 흔적이다.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밤은 없고 희망을 뒤집을 절망 또한 없다. 황금이 불로 정제되듯 고난은 생각하게 만들고 지혜롭게 만든다.
가끔 “나는 지금 불안하다”는 탄식이 들려온다. 위기를 느끼지만 좋아하는 명곡 봄과 전원도 불안 속에서 태어났다. 고난의 언덕에 핀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힘들었던 일이 가장 달콤한 추억이 된다. 한 송이 들국화도 천둥 번개의 공포 속에서 꽃망울을 새기고 하늘의 새도 추락의 공포 때문에 짠하게 운다. 지는 해가 눈부신 것도 석양을 통해서 보았다. 고난을 뒤집는 대로 결정타를 날릴 앙스트 블뤼테의 소망이 이 봄에 한껏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