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건설회사의 대표가 신규 건설사업이 한창인 부지를 직접 방문했다. 그 곳은 밀집한 노후지역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해당 지자체가 도시계획구역으로 지정한 후 새롭게 개발을 서두르던 곳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대표는 현장 책임자에게 뜻하지 않은 문제점을 보고받았다. 사업부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개발사업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굵은 줄기와 넓게 뻗은 가지는 이 나무가 수백년의 나이를 먹은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게 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를 ‘할머니 나무’라고 한다고 했다.현장 책임자는 대표에게 사업의 기본 설계대로라면 이 나무를 제거해야 하지만 주민들이 적극 반대하고 나서서 난감하다고 보고했다. 반대하는 주민은 대부분 노령층이라고도 했다. 대표가 현장에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의 한 노인이 다가와 “이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수백년 이 마을을 지키면서 마을의 중요한 일들이 모두 이 나무 아래에서 결정됐다”고 말했다. 전쟁 때에는 피난민들이 이 나무 그늘 아래에 모여 쉬어갔고 매년 나무를 중심으로 축제를 열어 주민화합을 도모했다고 설명했다. 나무는 그 마을 사람들의 생명과 역사, 그리고 미래가 함께 숨쉬고 있다고도 했다.대표는 다음 날 설계팀을 긴급 소집해 나무를 살리면서 건물을 지을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설계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설 비용이 30% 이상 증가하고 공사 기간도 6개월 늘어난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다. 그 보고를 듣던 대표는 조용하게 말했다. “나는 모든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항상 자문했다. 100년 후에도 이 선택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나의 나침반이었다”며 “효율성만 따지는 것은 컴퓨터도 할 수 있지만 사람다운 결정,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결정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설계팀은 나무를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디자인을 새로 만들어 냈고 새로 지어진 건물의 1층에는 나무의 역사와 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전시관이 마련됐다.영어권 사람들은 '올드 이즈 골드(old is gold)'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오래된 것이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만한 말이다. 전통적인 가치가 변하지 않고 문화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주변에는 많이 있다. 오랜 세월 사람의 손때가 묻어 버려진 것들 가운데서도 눈여겨 보면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널려 있다. 폴매카터니의 노래 ‘Junk’는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거나 눈여겨보지 못한 것들에 담긴 풍부한 이야기와 추억, 그것들의 소중함을 잘 그리고 있다.‘Motor cars, handlebars/Bicycles for two/Broken-hearted jubilee//Parachutes, Army boots/Sleeping bags for two/Sentimental jamboree. 자동차, 핸들바/2인용 자전거/상심한 기념일//낙하산, 군화/2인용 침낭/감상적인 모임’ 고물상을 지나가면서 눈에 띄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갑작스럽게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갔던 기념일과 모임을 떠올린다. 고물상에 버려진 것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더 있다. ‘Candlesticks, building bricks/Something old and new/Memories for you and me. 촛대, 건물의 벽돌/오래됐거나 새로운 것들/ 너와 나의 추억.’ 누군가에 의해 쓰여졌다가 그 효용이 다해 버려졌더라도 그것이 오래됐거나 새로운 것들이어도 대부분 이야기를 담고 있고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이 켜켜이 쌓이면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올드 이즈 골드’라고 말하는 이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우리는 새로운 것들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노후한 건축물이나 길목은 어김없이 허물고 지워버린 뒤 새로운 것들로 채워 넣는다. 그 사이 우리의 기억과 역사, 그것들이 간직한 문화는 깨끗하게 인멸된다. 개발론자들의 의욕적 주장에 너무 쉽게 넘어간다. 수백년 시민들의 삶의 질곡과 문화가 차곡차곡 모였던 경주의 쪽샘지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도 새롭고 근사한 공원을 상상했던 한 공직자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다.지워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치장을 잘못해서 차라리 없애버리는 것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경주의 북천철교의 경관 개선사업이다. 경주시는 2025년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총사업비 7억원을 들여 동해남부선이 폐선되면서 남아 있었던 북천철교의 경관을 개선하고 있다. 현재 벽화 도색은 지난해 5월 착공해 성곽 외벽 무늬를 주제로 마감됐고 상부 구조물 도색도 마무리됐다. 여기에 경관조명까지 설치한다고 한다.북천철교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성곽 외벽을 상징했다는 벽화 도색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마치 싸구려 벽지를 발라놓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낡고 녹이 슬어도 100년 넘게 서민들의 숱한 사연을 실은 열차가 입김을 뿜으며 달렸던 철교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었을까. 낡고 허술해 보여도 그 자체로 역사가 있고 연륜이 묻어 있다면 그 가치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다. 덧칠해서 망가지는 나쁜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오래된 것의 가치와 소중함을 잊어버린다면 새로운 것에 깊은 혼을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