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화를 참 좋아합니다. 어릴 때 만홧가게에서 만화책을 몇 권씩 대여해 와서는 하루만에 후딱 다 읽고도 반납하는 날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서 내용을 외다시피 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용돈으로 만화책을 자주 대여할 수가 없으니까요. 당시 대부분의 부모들은 만화가 공부에 방해가 된다 생각해서 자기 아이들이 만화 보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습니다. 
 
하지만 동화나 전기 같은 책들과 마찬가지로 만화 속 세상에 들어가 내가 주인공이 되어 보는 상상은 알게 모르게 내 생각의 지평을 키우고 넓히는 데 한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며 만화도 ‘그래픽 노블’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모바일로도 볼 수 있는 ‘웹툰’이 어엿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심지어 인기 있는 웹툰은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성인이 되고 재미나게 읽은 만화 중에 윤승운 작가의 ‘맹꽁이 서당’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원래의 서당 이름은 공자와 맹자에서 따온 ‘공맹서당(孔孟書堂)’이지만 서당에 다니는 장난꾸러기 악동들이 너도나도 맹꽁이서당이라 부르니 그 이름으로 굳었나 봅니다. 맹꽁이서당의 악동들은 틈만 나면 훈장님의 눈을 속이고 놀러나갈 궁리만 하고 그러다가 늙은 훈장님에게 들통이 나서 단체로 종아리를 맞습니다. 
 
그러고 나면 훈장님은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역사 인물의 야사를 재미나게 들려줍니다. 이런 짜임새로 고려, 조선의 인물들이나 사건을 풀어가는 내용을 매달 만화잡지에 연재했는데 이후 단행본으로 15권까지 출판되어 팔릴 만큼 어른들에게도 재미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의 개구진 장난에 늘 넘어가기만 하는 훈장님이지만 엄하면서도 자상한 면도 갖추어 아이들은 궁극적으로는 훈장님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조선말까지 초급 교육기관으로 서당이 그 역할을 했고 훈장은 학동들에게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사자소학이나 동몽선습과 같은 비교적 기본적인 교재의 읽고 쓰기를 가르쳤습니다. 근대적 교육이 들어오면서 서당도, 훈장도 사라져갔고 가끔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비칭(卑稱)하여 훈장이란 말을 썼지요. 
 
훈장은 오늘날 용어로 선생님이나 스승님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스승’이나 ‘선생’이 모두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스승’은 단순한 지식 전달자를 넘어 삶의 지혜까지 가르쳐 인도하는 정신적 지도자란 의미로 쓰이며 존경의 염을 담고 있으나 ‘선생’은 비교적 직업적 개념으로 혹은 큰 의미 없이 일반적 경칭으로 썼습니다. 
 
간혹 ‘선생’에 접미사 ‘님’을 붙여 ‘선생님’이라 하면 ‘스승’의 의미와 어느 정도 비슷하게 쓰입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관용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스승은 외경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매스컴에서 접하는 선생님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존경은커녕 세상사가 이렇게나 바뀌다니 하는 한탄이 나오도록 선생님, 특히 초‧중‧고등학교 교사의 위상이 심각한 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최근에 속상한 기사를 또 접했습니다. 제주 어느 중학교 교사가 도를 넘는 학부모의 민원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두 해 전쯤 많은 이들이 공분하고 애도하던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이 떠오릅니다. 
 
교단에 선 지 한두 해밖에 안 된 젊은 청춘이 얼마나 시달리고 힘들었으면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서 생을 마감했겠습니까? 그의 죽음 뒤에도 역시 학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반복적 민원이 있었다지요. 그런 극단적인 사례 외에도 교사의 당연한 훈육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보도됩니다. 한 학생이 소란을 피우며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방해해도 교사가 제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앞뒤 맥락은 잘라 버리고 교사의 훈육만을 문제 삼아서 학부모가 교사에게 반복적으로 금품을 요구한 사건도 있더군요. 결국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을 썩이던 교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서야 사건이 드러난 사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학교 관리자인 교장이나 교육청은 교사를 보호하고자 하는 생각도, 보호할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 이런 현상은 근년 들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까닭이 낮은 출산율로 외동아이가 늘어나다보니 그 아이가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려면 마땅히 필요한 가정에서의 훈육이 부재한 데다 내 아이는 항상 남보다 우선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부모의 이기적인 자녀 사랑이 더해진 결과가 아닐까요? 
 
경제 성장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기에 태어난 요즘 청소년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물리적 체력은 강해졌으나 정신적 성장은 오히려 반비례하여 약간의 훈육이나 제재도 견디지 못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매년 오는 5월 15일의 스승의 날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있을 정도로 교사들은 스승의 날을 대하는 학교 밖의 부정적 시선에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선생님을 신뢰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학생이 과연 그 선생님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권위를 빼앗긴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받는 물리적‧정신적 압박에 아무런 실질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교육당국과 교육 행정가들이 문제를 방치하는 동안 우리나라 교육은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맹꽁이서당이야말로 비록 마을의 사랑채 하나를 빌려 쓰는, 겉보기는 소박하고 보잘 것 없는 학교지만 필요한 때에 적절한 훈육을 하는 훈장님이 있고 말썽쟁이들이지만 훈장님을 믿고 따르는 학동들이 있어서 함께 만들어 가는 멋진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