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山河)는 나날이 녹색 털실을 하염없이 풀고 있는 형상이다. 지난 봄 그토록 형형색색 고운 빛깔로 온 누리를 환히 밝혀온 온갖 꽃등들이었다. 산천이 온통 푸른 것은 이것이 하나, 둘 꺼진 이후 보이는 자연 현상일 것이다. 찬란한 봄의 향연을 마친 나무들 꽃 진 자리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또한 알알이 열매도 맺혔다.
이로보아 꽃은 아름다움만 뽐내는 게 아니었다. 비록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단명(短命)한 꽃이다. 꽃은 짧은 시일 동안이지만 참으로 치열하게 혼신을 다한다. 그 열정은 끝내 결실인 열매를 잉태케 했다. 그럼에도 꽃은 겸손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하여도 결코 교만하지 않다. 
 
튼실한 열매를 갖추기 위하여 욕심을 내거나 다른 종(種)을 탐하지도 않는다. 복사꽃이 지고나면 복숭아가 맺히고, 매화가 시들면 매실이 열린다.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진리와 다름없다. 꽃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일찍 알려주었으련만….
우린 무지몽매하여 이 원리를 거부하고 외면해 온 듯하다. 매화가 사과를, 사과 꽃이 배를 열매 맺지는 않잖은가. 필자는 그동안 사물이 지닌 원형(原形)엔 무관심 했다. 꽃은 본질을 숨길 줄 몰라서 정직하고 성실하다. 이것을 황혼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것이다. 
 
장미꽃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과욕이 없다는 것을 왜? 이제야 깨우칠까? 장미꽃잎이 낙화 한 후 작은 열매인 '힙 (hip)'안에 들어있는 씨앗 한 톨을 꺼냈다. 이것을 앞에 두던 어느 날이었다. 그것에서 꽃의 진면목을 발견하곤 그동안 겉볼안만 중시해온 근시안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감꽃이나 이화(梨花)만 하여도 장미처럼 화려하진 않다. 특히 배꽃은 바라볼수록 정갈하고 순연하다. 보름달 달빛이 꽃잎에 스밀 때 순백을 지닌 배꽃의 아름다움은 처연할 정도로 희고 창백하다. 빛나지 않는 화려함이랄까.
이런 배꽃이 지고나면 여름날 작열하는 태양빛을 온몸으로 흡인하며 날로 과육을 살찌우곤 한다. 그리곤 주먹만 한 크기의 달디 단 열매를 우리에게 선사 한다. 돌이켜 보니 그동안 무심코 먹어온 배 한 덩이, 사과 한 알 속엔 온 우주가 깃들어 있었는데 이를 간과했다. 비바람과 뙤약볕이 꿀물로 변하여 과육을 살찌운다는 사실도 모른 체 했다. 우매함의 소치였다.
시간만 나면 필자는 동네에 위치한 호숫가를 산책하곤 한다. 요즘 이곳을 거니노라면 성가신 일을 겪는다.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벚나무 가지가 휘도록 열린 버찌에 의해서다. 어느 사이 이 버찌가 익어간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세상사에 시달리며 살아온 듯하다. 땅에 무수히 떨어져 발아래 짓밟히는 버찌다. 이것을 본 후 비로소 고개를 들어서 벚나무를 올려다보는 여유를 가졌다.
이곳 호수 둘레 길을 찾을 때마다 발아래 밟혀서 으깨어지는 버찌다. 이것이 운동화 밑창에 달라붙으면 쉽사리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것을 대하노라니 언젠가 텔레비젼 뉴스 내용이 떠올랐다. 가을이면 가로수인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이 골칫덩어리란다. 길가에 떨어진 은행이 행인들에게 밟힐 때마다 풍기는 고약한 냄새로 인하여 사람들이 곤욕을 치른다고 했다. 은행 겉껍질에 포함된 빌로볼, 은행 산(酸) 성분 때문에 발생 하는 냄새이련만 역겹긴 하다.
그러나 버찌는 은행과는 다르다. 봄 날 화사한 꽃을 자랑하다가 봄바람에 꽃잎이 낙화 한 후 맺히는 버찌다. 처음엔 붉은 보석을 닮은 작은 열매다. 그리곤 이맘때가 되면 차츰 농익어서 까만 열매로 변신, 더 이상 제 살을 주체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이렇듯 꽃은 자신의 결실에 연연하지 않는다. 열매가 무르익으면 아낌없이 내어줄 줄도 아는 지혜와 아량을 갖췄다. 우린 어떤가. 인생의 꽃길을 일러서 ‘꽃을 피웠다’로 표현 한다, 이 때 과욕 탓인지 피운 꽃을 잘 간수하기는커녕, 더 많은 꽃과 결실을 갈구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예사 아니던가. 꽃에 대한 예찬을 하노라니 장윤정 가수가 부른 ‘꽃’이란 노래가 절로 입속으로 흥얼거려진다. ‘날 찾아 오신 내님 어서오세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라이라이야 어서오세요/ 당신의 꽃이 될래요./ 어디서 무엇하다 이제 왔나요/ 당신을 기다렸어요’<하략> 꽃은 폭풍이 몰아쳐도 꽃잎을 버릴지언정 본색을 저버리진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기 위하여 순리에 순응하는 겸손함도 갖췄다. 위 노래 가사만 하여도 그렇잖은가. 물론 이 노래 가사에서 ‘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과 기다림을 약속하고 있다. 사랑 앞에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요즘 아닌가. 하지만 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고지순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성 있는 사랑의 본연(本然)이자 결실이라면 지나친 해석이려나.
그러고 보니 인내와 기다림을 감내하는 꽃이다. 꽃은 식물 생태학적으로 살펴보면 꿀벌이나 나비가 행한 단순 꽃가루 수정 덕분에 결실을 맺는다. 이 또한 기다림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기다림은 인내와도 일맥상통 한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자가 때론 승리를 거머쥐기도 하잖은가.
한낱 꽃이련만 세상살이에 대한 진리와 지혜가 한 송이 꽃 속에 오롯이 숨어 있다. 이제라도 꽃이 지닌 덕목인 기다림과 겸손, 인내를 마음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아야 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