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와 요석공주와의 로맨스로 알려진 문천교는 일명 유교(楡橋)라고 한다.
 
왕의 부름으로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건너다 물에 빠지는 바람에 요석과의 만남이 이뤄진 파계와 설총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무대다.
월성 남쪽을 끼고 흐르는 문천에는 경덕왕 19년 760년 2월 춘양교와 월정교를 건립했다는 기록을 볼때 유교를 포함해 월성주변에만도 3개의 다리가 있었던 셈이다.
고려 말기 시인 김극기는 월정교를 시로 읊으면서 반월성 남쪽 토령가에 무지개 같은 다리가 문천속에 거꾸로 비치었네라고 해 당시 월정교가 아치형의 모습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월성을 반월성이라 함으로써 이후 모든 시인들의 작품속에 반월성이 등장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비록 문천교는 오늘날 월정교하류에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경덕왕 이전에는 월성과 낭산 남산을 잇는 주된 다리였다.
느릎나무로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유교라는데 정작 느릎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지 못한다. 통상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물푸레 등으로 혼용해 쓰고 있다.
국내에 자생하는 참나무도 종류가 엄청 많지만 도토리가 열리면 모두 참나무라 하듯이 느릎나무 역시 느티나무와 같이 혼용해서 사용되고 있다. 재질이 단단하니 목재 가구등으로 많이 사용될 법 하지만 가공의 어려움으로 목수들은 기피한다. 더구나 궁궐이나 사찰의 기둥은 전부 소나무로 알고 있지만 느티를 사용한 곳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비롯 해인사 법보전 화엄사 대웅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을 들 수 있다. 또 통영 세병관의 기둥과 경주의 천마총 관의 재질도 느티나무다.
나라마다 궁궐과 사찰 등 건축재료로 사용될 소나무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숲을 보호하고 벌목을 제한해 왔다. 신라 역시 신유림의 벌목을 금지했고 이순신장군도 한때 함경도 녹둔도의 산림보호 임무를 맡기도 했다.
법흥왕 이후 불교진흥으로 서라벌의 도시 정경을 사사성장 탑탑안항이라 한 것을 보면 그많은 사찰의 기둥이나 건축재료의 조달로 인해 숲의 황폐화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선덕여왕 재위 16년동안 분황사 영묘사에 이어 건립된 사찰이 25개에 달하며 9층탑까지 건축하려면 도시 주변의 거목들은 죄다 수난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황룡사9층탑은 어떤 나무로 지었을까. 그것도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높이 80미터에 달하는 목조탑을 조성했다면 2백여명에 달하는 장인의 능력 이전에 다량의 건축자재를 조달한 국가의 역량이 먼저 경이롭다.
신라 천년의 흔적은 돌로 만든 탑이나 주춧돌로 나타날 뿐 나무는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썩거나 불에 타 사라졌다. 우리는 복원된 유적의 결과물에만 열중하지만 정작 돌과 나무의 조달에는 관심조차 없다.
사찰의 불상과 부처의 조성을 위한 쇠붙이와 돌을 비롯 궁궐이나 사찰을 떠받쳤던 금강송과 무수한 석재들의 모습은 상상속에 어련거릴 뿐이다.
한편 경주 주변에는 금광조차 없는데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한다. 신라금관의 화려함 이전에 그많은 금의 조달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결국은 하천에서 채취한 사금일 수 밖에 없다.
사금을 채취하는 민초들의 수고와 노력이 금관에 아련거리고 목석을 다듬는 장인들의 땀이 건축물의 화려한 단청속에 배어나고 있다.
기둥의 주춧돌도 많은 사연을 안고 있듯이 역사 유적답사도 눈팅으로 그칠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월정교의 화려함에 가려진 문천교를 보듬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