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공업고에는 1984년 11월 총동창회에서 건립한 ‘6.25참전 전몰학우위령비’가 있다. 이 위령비에는 학도병 전사자 스물네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 ‘許 火允’의 한자를 물어왔다.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글자는 찾을 수 없었고 여러 선학에게 문의해도 그 자는 알 수 없었다. 난감했다. 학도병 전사자의 이름을 몰라선 안되지 않는가? 이후 학교에서 국가기록원에 확인한 결과 그 자는 ‘允’ 자로 ‘허윤’, ‘火’는 항렬 부수라고 했다.
뜻밖으로 경주공업고의 학도병은 ‘다부동 전투(837고지, 8월16일~21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다부동이 어떤 곳인가? 파죽지세로 밀고 온 인민군을 맞아 낙동강 방어선으로 임시 수도 대구를 지키기 위해 전투가 치열했던 최전선.
인민군으로서는 대구, 부산을 가기 위해 뚫어야 했고 국군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고 지켜야만 하는 곳. 피아간 사활을 건 사투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십대의 학생들은 철모도 없이 교모를 쓰고 처음으로 총을 잡았다. 포탄이 작열하는 전장에서 그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참호에서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까? 밀려오는 적을 보며 내일은 기약 없었다. 아! 시대의 비극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나고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은 사흘 만인 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다. 1945년 해방을 맞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지 2년 미만. 정부는 수도를 대전(6월 28일~ ), 대구 (7월 23일~ )에 이어 부산(9월 14일~ ) 이후, 서울 탈환 이후에야 다시 돌아오게 된다(10월 1일~ ).
8월 1일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낙동강을 따라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Walk Line). 한반도가 적군에게 90% 넘어가고 대구, 부산만 남은 것이다. 이 전선이 뚫리면 부산마저 함락된다. 실로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전선에는 전사자가 넘쳐나고 이제는 청년학도. ‘학생들이여 일어나라! 펜 대신 총을 잡고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를 구하자!’
경주에서는 경주중 302명, 문화중 43명, 경주공업중 60명, 그 외 감포중, 안강중, 산내중 (당시 중학 5년제) 학생 428명이 학도병으로 참전, 이 중 104명이 전사하고 많은 실종자를 냈다.
경상북도에서는 6만 5000명, 전국으로는 27만 5200명. 그야말로 이름 없고 군번 없는 군인이었다. 지금 경주공고 학도병은 생존해 계신 분이 정천복(93), 윤원덕(92), 정병채(92) 세 분인데 이들은 작년 모교 후배들과의 만남에서 ‘전쟁의 잔상이 평생 남아있다’고 했다.
역사의 산증인인 참전 용사는 거의 아흔을 넘겨 생존자가 많지 않다. 지역 예술계에서도 정훈병으로 참전한 미술의 故 조희수 화백(1927~2023)이 향년 97세로, 경주중 학도병으로 참전한 음악계 故 안종배 지휘자(1932~2024)가 향년 93세로, 경주공업중 학도병인 연극계 故 이수일 연출자(1935~2025)가 올해 5월 향년 91세로 작고하셔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1950년 9월 14일 인천상륙작전 D-1. 바다가 폭풍 치던 이 날 새벽 장사리에는 772명 학도병을 태운 문산호가 작전명 174호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한다. 미군 사령부에서는 인천상륙작전 (Chromite 계획)의 교란 작전으로 원산, 주문진, 군산, 영덕 장사리 상륙을 펼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위장 전술로, 이명흠 대위가 이끄는 대대 병력은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장사 모래밭 상륙을 성공하고 인민군 5단과 교전 후 19일 철수한다. 전투 사상자는 전사 139명, 부상자 90명 이었다.
단지 엿새 간의 고지 점령으로 많은 청춘들이 사라져 갔다. 전쟁에 나간다고 하니 어떤 집에서는 고기를 사 주고 어떤 친구는 아버지가 양복을 맞춰 주었다고 한다. 필자의 아들도 군인이지만 정말이지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다.
어느 생존 용사의 이야기가 기구하다.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기 전 동네 형이 ‘니는 내 뒤에 꼭 붙어 있어라’고 했는데, 그는 총을 맞아 전사하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같은 등교 버스를 타도 휴대폰만 보고, 서로 이름도 모르는 요즘 학생들과는 격세지감이다.
지난 14일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서 ‘학도의용군 추념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신 노병 ‘손대익 용사(94, 포항시 송라면)’를 뵐 수 있었다. 노병은 고령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말씀하셨고 헤어질 때 했던 악수에서는 지금도 손아귀에 힘이 있었다.
참전 모자를 쓴 채, 흰 정복에 훈장이 선명한 노 용사는 ‘그 때 우리는 나라를 구한다는 일념으로 두려움도 없이 전장에 나섰다’고 하셨다.
 
이곳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적비’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40여 년의 긴 세월에도 피어린 학도병들의 영령이 긴 모래톱 여기저기에 말없이 절규하며 살아 숨쉬고 있다(1991. 9. 14, 포항MBC)’.
나그네여! 기억하라. 그대가 딛고 선 곳은, 한 젊은이가 그토록 닿고자 한 땅임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호국 영령들께 묵념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