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의 정수로 꼽히는 정원은 나라마다 특성을 달리하고 있다. 신라의 대표적인 정원은 안압지로 알려졌던 월지다. 궁성에 연못을 조성하고 풍류를 즐겼던 장소다.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신라보다 앞서 정원을 조성해 풍류문화를 즐긴 것으로 나와있다. 백제 진사왕7년 391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이상한 짐승과 화초를 길렀다는 것이다. 또 동성왕 22년 501년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성 동쪽에 임류각을 조성하고 높이가 5장에 달하는 못을 파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으며 밤새도록 환락을 즐겼다는 것이다.
백제 정원의 상징인 궁남지는 3만여평의 규모로 무왕 35년 634년 궁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리에서 끌어와 섬을 만들었다. 또 삼신산을 모방해 산을 만들고 뱃놀이를 즐겼다고 했다. 의자왕은 궁남지에서 망해정을 짓고 풍류를 즐겼으며 오늘날에도 연못의 연꽃과 함께 옛날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당과의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674년부터 월지라는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해 680년에 완공했다. 궁성 동쪽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으며 연못가에 동궁과 임해전을 건립하고 궁중 연회의 장소로 활용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안압지다. 오늘날 복원된 월지의 규모는 전체 1만2천여평에 연못은 동서 2백미터 남북180미터로 5천2백여평이다.
월지 조성의 의미는 삼국통일의 전승기념사업이요 왕경정비사업의 시발점이었다. 단순한 왕실정원의 조성이 아니라 기술적인 부분에서 엿보이는 고구려의 석조기술과 백제식 축조기법등으로 보면 통일 이후의 문화적통합의 상징물이며 승자의 위용을 드러낸 국가사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월지도 신라의 멸망과 함께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석축은 허물어지고 저습지로 방치되었다.
월지라는 이름조차 사라지고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한 가운데 오리와 기러기가 날아드는 서리리의 현장을 조선의 시인 묵객들은 안압지라 하며 서글픔을 노래한 것이다.
정원의 백미인 원지(苑池)는 진. 한시대부터 신선사상이 녹아들어 신선이 살았다는 삼신산을 모방하기 시작하고 곁들여서 무산12봉이 출현한다.
월지 역시 진시황이 그러했듯이 동쪽바다 건너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산을 고려하여 섬을 만들고 바다를 상징하는 海를 조합해 임해전이라는 전각을 건립한 것이다. 물론 백제도 궁남지에 어김없이 바다를 의미하는 망해루라는 누각을 지어 왕과 귀족들이 연회와 유락을 즐겼다.
나라별 조경의 특징으로 중국은 인공적인 세계를 조성하는 반면 우리는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자연에 녹아들게 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때문에 눈에 거슬리지 않는 자연스러움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일본은 자연과 인공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만들어진 자연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때문에 일본의 정원이 가꾸어진 분재의 아름다움이라 한다면 우리는 눈앞의 가꾸어진 아름다움이 아니라 지붕의 처마곡선과 함께 눈길이 와닿는 산수의 원경에 의미를 더하는 차경을 선호한다.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차경이야말로 자연속에 녹아든 정원인 것이다.
오늘날 자치단체마다 역사와 문화를 표방하며 향기를 덧 쒸우는 스토리텔링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의미부여는 역사의 왜곡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월지 역시 왕들과 귀족들만의 연회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궁성 시설의 일부로 서민들과는 별개의 세계인 것이다.
지나친 의미부여로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역사유적을 통해 신라를 보여 주기보다 현대적인 시설로 치장한 어설픈 경주를 보여주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흉측스런 모습으로 남아있는 그리스와 로마의 유적처럼 역사유적은 유적으로 남아 있을때 가치를 발휘한다. 부서지면 부서진 상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보존의 출발점이다.
유적이라기보다 돈으로 치장한 석재들과 건축물에서 역사는 이미 뒷전으로 밀려났고 견강부회의 화려함은 본질조차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복원이라는 미명하에 오색찬란한 조명과 함께 화려함을 더하는 것이 사치와 향락을 그리워하는 또다른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