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립극단의 연극 ‘을화(乙火)’를 보고 왔습니다. 이 연극은 올해로 16회째가 되는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공연되었습니다.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의 소설 ‘을화’를 마당굿 형식으로 재창조하여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열어둔 연출이 신선하였고, 전통과 외래문화의 대립과 충돌에 중심을 둔 원작의 내용에 혈연이라는 뗄 수 없는 관계의 끈끈한 사랑, 소통을 더한 연출자의 색다른 시선이 돋보였습니다. 
 
극중 굿 장면의 신명나게 울리는 북과 징 소리에 관객들이 손뼉으로 박수를 치며 극에 참여하도록 유도한 재미도 특별했습니다.
‘을화’는 작가가 1936년 발표한 단편소설 ‘무녀도’를 1978년에 장편으로 개작하여 발표한 작품입니다. 개작을 하며 내용의 분량도 늘어나고 등장인물의 이름도 달라지지만 ‘무녀도’의 줄거리와 주제의 기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무녀도의 모화, 낭이, 욱이는 을화에서 을화, 월희, 영술로 바뀌지만 무당 모화와 개신교 신자가 되어 나타난 아들 욱이와의 대립은 을화와 영술의 대립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모화와 욱이의 관계가 무속과 기독교의 대립, 전통과 근대의 대립에 중점을 둔 다소 평면적인 인물 관계라고 한다면 을화는 영술, 월희와의 끈끈한 혈연적 사랑과 그리움이 갈등에 첨가되어 좀 더 입체적 인물로 그려집니다.
때때로 산책 삼아 나지막한 언덕을 두어 개 헐떡이며 넘어 널찍한 금장대 대청마루에 앉으면 눈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전망이 참으로 시원합니다. 시야가 닿는 바로 앞으로는 덕동댐과 명활산성을 거쳐온 북천의 흐름이 달려와 서쪽에서 흘러온 서천과 금장대 아래에서 합류하여 수량이 더 풍부하게 합니다. 두 흐름이 만난 물줄기가 서로 안고 휘돌아 흐르는 곳에 애기청소가 있습니다. 
 
지금도 수량이 제법 많지만, 동리가 무녀도를 쓰던 당시는 훨씬 더 깊고 아득한 물돌이였으리라 상상합니다. 아들에게 씌인 서양귀신을 쫓으려 욱이의 성경책을 두고 굿을 하던 모화는 성경책을 지키려는 아들 욱이와 몸싸움을 하다 탈혼(脫魂) 상태에서 욱이를 칼로 찌릅니다. 욱이가 죽은 후 모화는 온전한 정신을 놓아버리고 그런 모화가 굿을 하다 빠져 죽는 곳이 바로 여기 애기청소입니다.
지금은 그 주변이 정비가 잘 되어 흐르는 강을 막아 수량을 조절하는 얕은 보가 있고 그 위로 시민들의 산책을 위한 다리가 놓였습니다. 밤이면 다리 난간에 휘황한 색색의 불빛이 명멸하고 주변에는 높은 아파트가 즐비하지만 소설의 무대가 되던 시절의 애기청소 주변은 날아가던 새들이나 쉬어가던 한적한 곳이었겠지요. 
 
김동리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김동리 문학전집 26권 ‘수필로 엮은 자서전’에 동리가 어린 시절 살던 성건동 강 건너편 마을을 묵은 잡목이 빽빽하고 왕래하기도 불편한 낯설고 외진 먼 시골마을로 묘사하고 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합니다.
우리도 근대화 시기에는 전통문화가 외래에서 유입된 문화와 갈등과 대립을 겪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름을 서로 인정하며 각각의 고유성을 살려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종교에서 고유의 무속은 전통문화로 전승, 보존되고 이 땅에 오래 뿌리내린 불교와 외래의 천주교와 기독교, 그리고 비교적 신생인 원불교 등 다양한 종교들이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존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종교가 서로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현상은 우리나라만이 가지는 특징이라 평가하는 이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조선말 피바람 불던 천주교 박해 시대가 있었고, 새마을운동이라는 사회 개혁 운동 시기에는 전통 무속을 폄훼하여 청소해야할 대상으로 삼기도 했지만, 그런 일들은 모두 권력자들의 편협한 가치가 빚어낸 결과이지 일반 국민들의 정서는 그것과는 또 달랐습니다.
간혹 종교의 다름이 원인이 되어 촉발된 나라간의 전쟁, 또는 한 나라 안에서의 내전을 해외소식으로 접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본질은 자선과 사랑의 실천에 두고 있으나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에서 조금씩 다를 뿐인데, 그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적대시하여 싸우는 부조리와 미사일이라는 대량 살상 무기로 수많은 목숨들을 죽고 죽이는 행위를 보는 것이 눈물겹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이 어느 정도 종식되는가 싶더니 시아파 무슬림 국가인 이란과 유대교 신봉국인 이스라엘이 서로를 악마화하며 폭탄을 퍼부어대던 중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을 일단 멈추기로 했다는 국제뉴스를 읽으며 든 잡다한 생각입니다.
연극 관람에서 동리의 소설로, 다시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너무 멀리 가지치고 벋은 생각의 흐름을 산만하다 보시기도 하겠군요. 강이 제 마음 가는대로 흐르듯, 잠이 없는 늙은이의 생각이 한 가지로 모아지지 못하고 가지에 가지를 치고 또 곁가지가 벋는 대로 내버려두어 그런가 하고 여겨주시기를 원망(願望)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