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황제들은 나라에서 큰 공사를 계획하거나 전쟁을 일으킬 때 대부분 풍수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곤 했다. 이것은 모든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신비한 땅의 힘 즉 지력(地力)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개석 총통이 권세를 잡은 것은 그의 어머니 산소가 풍수적으로 좋았기 때문이고 훗날 그가 몰락한 것은 공산군이 그의 산소를 파 해쳤기 때문으로 중국인들은 믿고 있다. 
 
쿵후의 달인 이소룡이 갑자기 죽은 것도 그의 좋지 않은 집터 때문이라는 등 서양인이 영문으로 쓴 중국의 풍수서를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편역한 ‘서양인이 본 생활 풍수’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과거부터 전쟁을 일으킬 때 풍수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곤 했다는 부분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확인이 된다.
1592년 임진년 왜군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이 중국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명나라는 원군을 이끌 수장으로 이여송 장군을 임명하였고 그는 그의 일급 참모이자 풍수 전략가인 두사충을 대동하여 조선에 왔다. 
 
두사충은 임진왜란에 많은 공을 세우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몇 년 후 정유재란 때 다시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에 왔으며 그 길로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해 정착하게 된다. 
 
그는 귀화 후 대구에 살기를 원했으며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자기가 원하는 곳에 살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을 그의 고국 ‘명’나라 이름을 따 대명동(大明洞)이라 하였고 이것이 현재 대구시 남구에 있는 대명동의 유래다. 그
 
는 원래 풍수 참모였기에 그 당시 명나라의 국운이 다했음을 미리 알고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했으며 예견대로 5년 뒤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두사충은 풍수 전문가로서 젊은 시절 대구 인근에 자기가 묻힐 장소를 잡아두었고 훗날 자기의 죽음이 다가오자 그 장소를 아들에게 알려주려고 병든 몸을 이끌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당시 몸이 너무도 쇠약하다 보니 기관지에 담이 끓어 도저히 그곳에 이르지 못하고 되돌아왔는데 그 고개가 현재의 수성구에 있는 담티 고개이며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 계좌정향(남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들이 번창할 것이다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아들들은 아버지가 잡아놓은 명당자리에 정확히 묘를 쓰지 못하고 그 아래쪽에다 매장하였다. 현재의 대구 만촌동 남부 정류장 뒤편에 위치한 형제봉 아래에는 두사충의 묘소와 함께 사당 모명제가 있는데 모명제 역시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풍수서 두사충결(杜師忠訣)은 생전 조선팔도를 답사해 여러 명당자리를 소개한 책자이고 지금까지도 국내 풍수계에 회자 되고 있다. 조선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과 절친하여 충남 아산에 있는 초창기 충무공의 묘소 역시 두사충이 점지한 곳이었다. 
 
그의 직함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전투 때 군사가 머물 군진(軍陣)에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고, 이러한 역할은 당시 군 조직에 장수를 보필하는 풍수 참모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