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사리를 모신 전각을 적멸보궁이라 하고 불상이 없다. 사리 자체가 부처이기에 별도로 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만 조성하고 전각 바깥에 계단(戒段)이나 사리탑을 조성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전후 소장 사리'에는 불경의 도입과 사리의 전래와 분화 및 도난사건을 비롯 사리함의 구조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리는 진흥왕때인 549년 유학승 각덕이 양나라에서 가져와 흥륜사에 보관한 것이 시초다.
이후 익히 알려진대로 643년에는 자장이 사리 100과를 가져와 황룡사와 통도사 울주 태화사에 삼분했다. 통도사 사리는 금강계단에 설치된 돌뚜껑 아래 돌함이 있고 그 안에 유리로 된 사리병에 사리를 담았다.
그러나 유리병이 상해 터진 곳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2겹의 방법으로는 안전성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때 관리들이 사리를 보기 위해 돌함의 뚜껑을 들었을때 한번은 구렁이가 한번은 뚜꺼비가 들어 있었고 사리는 불과 4과만 있었다고 해 밀폐성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의 사리보관 방법은 통상 외함 외합 내합 사리병의 구조로 안전과 신성함을 강조하는 겹겹의 방식으로 발전한다. 함(函)과 합(盒)의 구별은 뚜껑의 분리성에 따라 뚜껑을 여닫는 것을 함이라 하고 뚜껑이 본체와 분리되는 것은 합이라 한다.
또 합(合)은 포개지는 것을 의미한다. 함과 합사이에는 틈이 없어야 한다. 정교함에서 오는 무간(無間)이다.황룡사탑에 보관했던 사리함의 경우 세번째 화재에서도 돌함의 동쪽면에 고작 얼룩이 생길정도였다고 해 화마가 속으로 침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대해 고려의 진각국사 무의자는 황룡사의 사리함에 대해 불에 탄 한쪽면도 틈을 찾을 수 없다며 '示無間'이라고 해 정교성과 밀폐성을 표현하고 있다.이처럼 함속에 합을 담는 겹겹의 방식은 내용물의 보관과 안전성 나아가 밀폐와 신성함의 강조라 할 수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석가탑의 사리함도 금동으로 된 방형사리함에다 원구형의 은제사리 외합과 내합속에 사리병을 안치하는 형태였다.제목에서 보듯 전후 소장 사리는 신라때의 사리를 전사리라 하고 고려때의 사리를 후사리라 하며 일연이 아닌 제자인 무극이 쓴 글이다.
고려 고종은 송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어금니사리가 강화도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고 1236년 사리의 행방을 조사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조사가 시작되자 보물인줄 알고 훔쳤던 궁중내의 관리가 문책이 두려워 사리함을 반납한다. 반납한 후사리는 당초 5겹으로 3겹의 함과 2겹의 합으로 돼 있었으나 반납할 당시에는 유리함만 있었다고 했다.
본래 사리는 제일 안쪽에 사리를 담은 침향합이 있고 다음 한겹은 순금으로 된 합으로 두 합을 다시 은으로 된 함에 담았다. 그 은함의 바깥겹은 유리함이며 맨 마지막은 나전으로 된 함으로 각 함과 합은 틈이 없을 정도로 꼭 맞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부처의 사리에 대해 일반인들의 현실적인 사고는 과학적인 합리성으로 재단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교라는 종교적 관점에서 판단할 경우 신이성과 정당성을 부여받게 되고 경배의 대상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특히 부처의 사리는 이땅에 부처가 함께한다는 사고로 이어져 후사리를 되찾은 고종과 신하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기록돼 있어 당시에도 사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무극이 쓴 전후 소장 사리는 1236년의 사리도난 조사과정에서 168년전의 인물인 최충이 조사에 참여한 것으로 나와 오류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