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볕이 들판을 헤집는다. 주택가에 밭 한 필지가 있고 땅콩을 훑고 난 덤불이 수북하다. 옳다구나 싶어 일일이 헤쳐 보았다. 이삭을 줍는 거지만 한참을 뒤져 모으니 작은 쇼핑백에 가득 찼다. 땅콩을 좋아하는 내게는 횡재나 다름없다.    장에 가서 한 바구니 사 와도 되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설익은 땅콩이다. 상품 가치가 없으니 남겨둔 거다. 물컹한 대로 겉껍질만 벗겨서 불그름한 속껍질째 먹으면 상큼한 맛이 돈다. 풋내가 좋은 나는 그렇게 반 정도 익은 것만 찾아다녔다. 통통하니 잘 여문 땅콩에서는 찾기 힘든 맛이다. 그만큼 좋았던 걸까.설익은 것을 좋아한다. 시월의 농익은 냄새보다 가을 초입 떠도는 풋내가 더 끌린다. 하늘도 그때는 완전 파랗지는 않다. 가을장마는 지나갔어도 어쩌다 먹구름 틈으로 푸르게 물든 하늘이 앳되다. 구월에 묵인되는 풋내의 배경이다.붉은 반점 찍힌 풋대추도 살짝만 익었다. 오늘 아침 따 온 풋밤도 푸르스름한 껍질만 벗겨내면 그냥 먹기 좋았다. 아직 구월이라 좀 더 익어야 하는데 껍질이라 해도 얇은 막 보늬는 전혀 떫지 않고 야들야들하니 먹을만하다.이제 막 익기 시작하는 풋사과도 감칠맛이 돈다. 며칠 전에도 새파란 아오리 사과를 먹는데 풋내가 나면서도 사각사각한 게 맛있다. 복숭아나 자두 같은 여름 내기 과일이 덜 익을 때는 맛이 떫지만, 구월에는 이렇다 하게 탈은 없었다. 농익으면 팍팍해서 체할 수 있지만 설익은 것은 잘못된다 해도 빛깔 푸른 똥으로 나올 것 같다.밭 한 모서리 후벼 파면 애기 주먹 같은 고구마도 몇 개쯤 캘 수 있다. 발그레한 껍질은 물에만 씻어도 훌훌 벗어지고 예의 또 풋내가 느껴진다. 도라지 역시 얼마나 사근사근한지 살피듬이 뽀얗게 드러날 정도이다. 풋내도 풋내지만 다듬기가 편하다. 설익어도 되는 게 가을의 특권일까.콩대를 꺾어 알불에 그을리면 설익은 중에도 맛은 독특했다. 콩꼬투리와 깻송이도 웬만큼 익은 듯 노랗게 물드는 중이다. 결삭은 들깨와 벼 이삭을 담뿍 떠내서 윤곽을 따라 감치면 모듬모듬 수라도 놓을 것 같다. 여기저기 익는 서슬을 보면 바람에 줄 뚱기는 소리가 날 법하건만 시치미를 떼고 있다. 덜 익은 게 스스로도 민망한 것처럼.벌레까지 조심스럽다. 섬돌이나 풀밭에 모여 날개를 비벼대고 노래를 해도 자신은 없는지 귀를 기울여야만 들린다. 합창이나 하듯 리드미컬한 귀뚜라미 노래도 어설프게 들렸다. 여치와 쓰르라미 외에 베짱이는 더더욱 신출내기다. 시작은 했는데 언제 끝났는지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초록이 완전 주춤한 것도 아니고 단풍 시즌도 아닌 애매한 시점에서 채 익지 못한 구월의 냄새가 난다.코스모스도 수줍은 듯 풀밭에 숨어 핀다. 얄팍한 달맞이꽃은 창호지에 찍힌 무늬처럼 연하고 투명해서 꺾일까 조심스럽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고 좋아하는 것도 초가을 속내이다. 고추도 절반쯤 붉어진 게 끌렸다. 햇고추가 나오기 전 다져서 고춧가루 대신 넣으면 양념 맛이 칼칼하다.논둑을 지나갈 때도 옹골차게 익은 벼알이 탐스럽다. 진초록일 때는 억세 보이기만 해서 내키지 않았다. 올벼 심은 고래실논은 누렇게 익은 벼 이삭이 벌써부터 금물결인데 그런 속에서 조금씩 결 삭는 이삭이 가을 문턱을 넘고 있다.가끔은 나무 그늘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엊그제 도서관 근처의 카페에서 동무와 만나기로 했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 출발하는데 사정이 생겼다며 1시간 정도 늦어질 거란다. 알겠다고 통화를 끝낸 뒤 도서관 후문의 공원으로 향했다. 철책 뒤로는 잡목이 우거졌고 여남은 개 나무 의자가 있다. 적당한 곳에 앉아서 책을 읽는데 뺨에 닿는 바람이 상큼하다.그늘 하면 칠팔월 느티나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녹음이 입추의 여지 없이 빽빽했다면 지금의 나무 그늘은 허룩하게 보였다. 하기야 그래서 바람이 더 산들산들 불었다. 그늘이라 해도 여름에는 쐐기와 개미가 극성이지만 지금은 따스한 볕과 시원한 수풀이 초가을 느낌이다. 금방 1시간이 지났다. 여느 때라면 갈증이 나고 잠깐 쉬어야 할 텐데 지루하지가 않다. 당연히 풋풋한 그늘 때문일 게다.얼마 후 동무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왕 늦었으니 카페로 갈 것 없이 여기서 만나자고 의견을 냈다. 잠시 후 동무는 커피와 케이크를 사 들고 왔다. 널찍한 그늘을 찾아 구수한 커피와 다과를 즐기면서 적조했던 마음을 풀었다.군데군데 들꽃 사이로 고추잠자리가 작은 비행기처럼 맴돈다. 드높은 하늘의 새털구름과 수제비구름도 비린내가 날 듯 여리다. 줄곧 봐도 익는 중인데 농익은 것과는 거리가 먼 구월 이미지 그대로였다. 어쩌다 나무 그늘 밑에서의 호사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가을의 문턱에서 이제 막 시작되는 익힘을 보았다고나 할지.다가올 시월이 완숙한 상태라면 지금은 반숙한 계란이다. 풍성하게 익어가는 정경을 보면 조급할 때도 있으나 아직은 덜 익어도 무관하겠지 싶다. 살짝 영근 채로는 씨앗이 될 수 없다. 더더구나 싹도 틔우지 못하지만 상큼한 풋내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라면을 끓일 때도 나는 살짝만 익혀 먹었으니까. 된장찌개 역시 건더기로 넣은 호박이며 두부가 설컹거릴 정도로만 익힌다. 무른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익혀야겠지만 나로서는 벌써 조리가 끝난 시점이 된다. 풋내가 나기 쉬운 참나물과 시금치 또한 알맞게 잘 데친다. 설익은 풍경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초가을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또한 풋사랑이다. 손 한 번 잡는 것도 쩔쩔매는 소년 소녀의 귀여운 뉘앙스다. 이맘때 특히 생각나는 걸 보니 나도 초가을 체질인가 보다. 설익은 과일이면서 농익기나 한 것처럼 뽐내는 것도 탈이지만 소박한 마음이면 괜찮다. 농익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어설픈 대로 익기 시작하는 구월처럼 시나브로 익어가는 소망을 품어본다.해거름이 되었다. 멀리 그림자 하나 끌고 가는 산자락을 보니 가을은 가을이었나? 하루하루 익어가면서 풋내가 사라질 게 아쉽기는 해도 잠깐이다. 시월이면 본격적인 익힘이 시작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 그때까지만 감상에 젖는 셈이다. 초가을 풋과일이 가끔은 설익은 채로도 맛난 것처럼 그렇게.오늘은 나도 한 눈 뜨고 꿈꾸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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