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9월이 왔다. 9월은 기다림의 달이기도 하다. 지긋지긋한 극한 폭염이 하루빨리 물러가고 선선한 날씨의 가을이 오길 얼마나 염원 했던가. 그래서인지 9월이 찾아오자 ‘한시름 놓았다’라는 안도감마저 든다. 
 
지난여름은 폭염에 시달려서인지 운신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외출이라도 할 요량으로 집 안에서 한 발짝만 나서도 극한 폭염에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 사이 9월이 찾아오자 오랜만에 아파트 앞 호수 둘레 길을 찾았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한 여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느덧 불어오는 바람 곁에선 가을 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 극한 폭염 속에서도 그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의 자연 풍광 때문이었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주변엔 불볕더위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는 숲이 있다. 이것이 안겨주는 청량감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땀이 식는 기분이었다. 그
 
야말로 ‘숲 세권’ 동네에 살며 누리는 소소한 호사라면 지나칠까. 뿐만 아니라 지척엔 쏟아지는 여름 햇살에 윤슬을 반짝이는 시원스레 펼쳐진 돌다리 못이 있다. 그 주위엔 약 1.8키로 미터의 둘레길이 조성돼 있어서 산책과 운동하기가 매우 좋다.
이곳에 사노라니 수도권에서 최고로 시설 좋게 잘 지었다는 여느 아파트가 결코 부럽지 않다. 이 둘레 길을 걷노라면 근심 걱정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곤 해서다. 무엇보다 회색 도시에서 사계(四季)의 자연 현상을 감상 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뿐만 아니라 목가적인 서정도 덤으로 만끽하고 있다.
이런 호수 둘레 길엔 9월이 오자 부쩍 나무 이파리들이 누렇게 단풍이 드는 게 눈에 띈다. 심지어 한, 두 잎씩 잎을 떨구어 포도(鋪道) 위에 나뒹굴고 있다. 이것들을 바라보자 어느 유명한 판사분 말이 문득 생각났다. 
 
‘변하지 않는 게 나무이나 또한 변화 하는 게 나무이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이런 나무들에 의해서다.’ 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분의 언술처럼 정녕 나무는 변할 줄 모른다. 한번 땅에 뿌리를 내리면 견고히 자신의 뿌리를 지킨다. 안위를 위해 비옥한 땅을 찾아서 이리저리 몸을 옮기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날짐승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면서도 결코 생색을 내거나 공치사도 하지 않는다.
이 생각에 잠기자 나무들이 지닌 진정성을 본받고 싶었다. 한 여름 낮엔 불꽃처럼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밤이면 머리 위에 무수히 빛나는 별들과 은은한 달빛에 가슴을 활짝 열고 온몸으로 맞이하는 숲의 나무들 아닌가. 어디 이뿐인가. 초저녁에 이곳 둘레 길을 찾노라면 나무들은 밤하늘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별빛을 온몸에 휘감고 서 있는 듯하다. 
 
또한 보름달 빛이 은은히 온 누리를 비추면 숲의 나무들은 그 빛을 오롯이 온몸으로 흡인하는 모습이다. 낮 동안 하늘을 향하여 활짝 펼쳤던 푸른 잎들을 다소곳이 모으고 달빛아래 고요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성자(聖者)와 같다.
이런 나무의 미세한 변화를 그 판사 분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매한 필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게 사실이다. 오로지 가시적인 현상 즉, 눈에 보이는 형상만으로 ‘나무도 변화 한다’ 라고 생각했다. 가을이 오면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곧이어 자신의 이파리를 땅 아래로 떨구는 그 모습만으로 나무가 지닌 변화를 감지했을 뿐이다.
단 한번이라도 숲의 나무들처럼 머리 위에 쏟아지는 별빛을 겸허한 자세로 밤새껏 온 몸으로 맞이한 적 있던가. 한순간이라도 달빛의 그 순연한 빛에 심신을 헹군 적 있던가. 가슴에 손을 얹어 본다.
그러나 나무는 밤마다 별빛과 달빛에 온몸을 맡긴 채 자연과 교감하면서도 결코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는다. 이렇듯 벚나무, 나도 밤나무, 버드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선 호숫가 숲을 바라보노라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신이 갑자기 부끄럽다. 때론 오만함을 지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에 잠기자 9월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만 안겨주는 게 아니었다. 필자에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오롯이 안겨주고 있잖은가. 그래서인지 패티 김의 ‘9월의 노래’ 라는 노래 가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 9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꽃잎이 피는 소리 꽃잎이 지는 소리/가로수의 나뭇잎은 무성해도/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 뿐/9월이 오는 소리 다시 들으면/사랑이 오는 소리/사랑이 가는 소리/남겨 준 한마디가 또 다시 생각 나/그리움에 젖어도 낙엽은 지고< 하략>’
위 노래 가사 대로 귀를 기울이노라면 9월이 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듯하다. 지난여름 폭염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가을이 성큼 곁에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지냈다. 그토록 날만 새면 목청껏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어느덧 9월이 오자 속절없이 자취를 감췄다. 아파트 정원에선 풀벌레 소리가 무성하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구슬프다.
9월은 지금 점점 옅어지는 태양빛과 서늘한 바람을 한창 준비 중이다. 필자 또한 9월 한 달만이라도 호수 수변 가 숲길을 거닐며 잊힌 이들을 떠올려 보련다.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그들에 대한 그리움도 가을바람에 실어 전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