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삼국통일의 의지를 다지게 된 단초는 대야성전투의 패배에 있다. 약소국 신라가 고구려 백제의 공격으로 끓임없이 시달릴때 642년 백제의 대야성침공은 충격이었다.   이 전투에서 춘추는 15세에 불과한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을 잃고 충격에 빠진다. 단순히 가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춘추와 김유신 등의 신흥세력들은 품석을 대야성도독으로 임명한 책임문제와 알천계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대한 돌파구가 외세의 도움이었다. 춘추는 먼저 고구려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는가 하면 당으로 가서 칭병을 위한 대당외교전을 벌인다. 아들 인문을 숙위로 보내면서까지 오직 백제타도를 위해 당의 협조를 구하는데 진력하고 유신은 전장을 누비게 된다. 대야성의 중요성은 합천지역이 뚫리면 경산지역이 최전선이 됨으로써 서라벌은 순망치한의 형국에 놓이게 된다. 사기에는 수많은 전투중에서 유독 대야성전투의 패배와 승리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춘추의 개인적인 복수라 할 수도 있지만 위치의 중요성과 대당외교를 통해 국가의 흥망을 돌파해보려는 정치적인 결단을 촉발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첫째 642년의 패배는 사실 도독으로 임명된 품석이 부하의 아내를 겁탈하는 바람에 부하가 적과 내통하고 창고에 불을 질러 결국 성을 빼앗기게 된 것이지만 단순한 패배가 아닌 정치적인 타격이었다. 둘째 648년 유신이 대야성전투에서 승리하고 사마천 이사열전의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를 언급하면서까지 품석과 고타소의 유해를 포로8명과 교환해 춘추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술하고 있다. 세번째는 660년 백제 의자왕으로 부터 항복을 받을때도 춘추의 아들 법민이 누이 고타소의 죽음을 상기하며 의자왕과 부여왕자 융을 꿇어 앉히고 모욕을 주는 등 관련자들을 처벌해 충격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와 유신세력의 성장은 선덕과 진덕의 시기로 여왕 재위시절이었다. 고대의 전쟁에서 왕이 직접 전장으로 출전하는 것과 후방에서 전장을 지켜봐야 하는 경우 권위와 힘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신은 군벌세력으로 입지를 다지고 춘추는 대당외교의 선봉으로 점차 정치적인 입지를 다져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춘추와 유신은 647년 1월 비담의 난 진압과 648년 대야성전투의 승리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다. 비담은 상대등의 지위로 볼때 유력한 차기 왕위계승자로 볼 수 있어 난의 진압은 정적제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유신의 기지로 비담파를 제압한 진덕의 재위 8년은 풍전축으로 전쟁의 나날이었다. 때문에 전장에 나선 유신의 위상이 높아질 수 밖에 없고 당과의 관계개선을 이끌어 낸 춘추의 입김이 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사기에는 춘추의 왕위계승을 알천공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해 춘추가 계승했다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으나 유사에는 화백회의를 거쳐 선양하는 형태를 기술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왕위계승을 논의하기 위해 오지암에 모인 화백은 알천 임종 술종 호림 염장 유신공 등 6명이다. 이 자리에 호랑이가 뛰어들어 모두가 놀랐으나 알천이 호랑이 꼬리를 잡고 메어쳐 죽였다. 그러나 알천의 완력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위엄에 모두가 복종했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제3세력을 의미할 수 있다. 모두가 놀랐으나 알천이 제압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지지기반이 굳건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대세는 춘추쪽으로 기울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654년 춘추의 등극은 성골에서 진골로 이어지는 왕위계승의 새로운 분수령이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시대구분을 상중하로 구분해 중대의 시작이라고 했다. 무열왕계열의 왕위는 혜공왕까지 이어지고 하대는 선덕에서부터 내물왕계열의 왕위가 계승된다. 이처럼 춘추의 백제정복과 문무왕의 고구려정복 및 대당전쟁의 승리로 삼국통일을 이룬 것은 대아성함락에 따른 정치적인 위기극복이 단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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