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하순에는 백제(百濟, BC 18~663) 답사여행을 다녀왔다. 1991년 9월 공군 상병이던 나는 휴가를 맞아 그곳에 갔는데, 청춘에 찾은 곳을 중년에 다시 가본 것이다. 그때는 국사책에서 보던 무령왕릉과 낙화암을 보고자 홀로 갔었다. 무령왕릉은 입구에서 본 게 생각나는데 지금은 왕릉이 막혀 있고, 유물관만 입장할 수 있었다.2015년 7월 공주, 부여, 익산의 8곳이 ‘백재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지금도 정림사지 석탑 옆 여관방과 고란사, 백마강은 내게 흑백으로 남아 있다.대전 성심당(聖心堂, 1956~ )은 규모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군산의 이성당, 목포의 크롬방도 줄을 서야하는 오래된 명물인데, 이 곳은 구역 하나가 단지를 이루고 있다. 본점, 케잌부띠끄, 팥빙수점, 레스토랑 건물이 따로 있어서 줄이 길고 빵을 사서 성심문화원으로 가야 비로소 앉아서 먹을 수 있다. 거기에 대전역점까지. 길 건너에 ‘대흥동 성당 (1962, 국가등록문화유산)이 있다. 한국전쟁 후 폐허이던 이곳은 천주교 세가 강한 곳 같다. 성심당 주인도 ‘聖心’으로 상호를 지은 걸 보면 신앙심이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성당은 높이 82미터의 건물로 고딕양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60년대 한국 건축 양식으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형상이다.공주(곰나루, 웅진熊津)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7일 송산리에 장맛비가 쏟아지면서 묻혀 있던 왕릉이 발견된다. 도굴 안된 백제 그대로의 묘가 발견된 것이다. 비가 갠 다음 날 제사를 지내고 벽돌을 쌓아 막은 입구를 열고 들어가니 왕을 지키는 진묘수(鎭墓獸)가 맨 앞에 있었다. 전돌로 된 석실고분에는 왕과 왕비의 나무 관재가 모셔져 있고 ‘백제사마왕’(斯麻王, 제25대 무령왕, 462~523)이라는 돌판이 나온다. 유물관에 재현된 석실을 기어 들어가니 천 오백년 전 그날이 느껴진다. 무령왕 흉상은 아주 사실적이어서 눈을 마주치니 마치 하명이라도 하는 듯하다.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을 찾아 갔더니 마침 신관이 7월 29일 개관했다. 2층에는 ‘공주 원로작가 3인전(서양화 : 김배히, 신현국, 임동식)’이 있는데 수준이 상당하다. 나태주 시인은 목월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목월은 시인에게 ‘나 군은 서울로 오는 것보다 고향을 지키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시는 사람들에게 작은 것에서 행복과 의미를 찾게 해준다. 대표작으로는 ‘플꽃’ 이 있다.부여 (사비) 부소산성 앞에는 ‘와당거리’가 있다. 인도 포장을 와당으로 형상화했는데, 와당 탁본으로 작업하는 필자가 보기에도 화려하다. 실로 백제 와당의 다양함이 박물관을 능가한다. 또한 인도에는 서예 구절을 음각해 놓아서 길을 가며 시를 감상할 수 있고, 그런 심미안은 인사동에서도 보지 못했다. 경주 분황사 옆 산업도로 교차로의 커다란 ‘가야금 타는 여인상’과는 비교되는 안목이라 하겠다. 다시 길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정림사지 석탑을 만날 수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9호)은 백제 탑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탑신에는 특이하게 ‘大唐平百濟碑銘 (대당평백제비명)’으로 시작되는 비문 약 2000자가 새겨져 있는데 660년 7월 13일 나당 연합군이 사비를 함락하고 8월 15일 소정방이 남겼다. 의자왕이 항복할 때 당군이 철수하기로 했으나, 그는 두 달 후 9월 3일 회군했다. 부여에는 의외로 ‘신라식당’도 있어서, 신라에 대한 거부감은 덜한 듯했다. 정림사지 석불좌상 (보물 108호)은 석굴암 불상을 봐 온 경주인의 눈에는 실로 파격적이다. 마치 운주사 석불 같은데 오히려 현대적이다. 세상만사는 고정관념을 깰 때, 새로움으로 다가온다.부여군청 앞 대로에는 ‘계백 (602?~660) 장군’이 장엄하게 말을 타고 황산벌 (논산 연산면)로 출정하는 동상이 있다. 백제의 5천 결사대를 이끌고 가는 그의 춘추는 쉰 여덟. 그 모습이라면 아마 그는 부인 목 씨와 늦게 본 개구쟁이 쌍둥이를 베고 나온 길이리라! 그럼에도 장군은 적진의 화랑 관창을 사로잡아서는 ‘열 일곱 소년’이라 처음에는 살려주었다. 국운과 사활을 건 전장에서 쉽지 않은 인간애이다. 그는 밀려드는 김유신의 5만 신라군에 네 번을 이겼으나. 결국 패전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왜의 제명여제(劑明女帝, 599?~661)는 의자왕의 동생으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다. 백제가 멸망하자 661년 1월 6일 오사카의 아스카 (飛鳥)이던 수도를, 후쿠오카 다자이후 (大宰府)로 천도하여 백제에 구원병 2만 7천을 보냈다. 여제는 도중 병사하고 아들 천지(天智) 천황 때, 부여풍이 이끄는 제왜연합군은 백강전투 (663. 8. 28)에서 나당연합군에 화공으로 패하고 만다. 이로써 백제의 항전은 끝나고 말았다. 이후 왜는 672년 ‘임신 (壬申) 의 난’이 일어나 천무(天武) 천황이 즉위하게 된다.군산 선유도에 가려고 여객터미널로 가니 그새 바다 위로 대교가 생겨 뱃길이 없어졌다. 바다 위를 차로 한참 달려 섬에 도착한다. 군산군도에서 유람선을 타니 이순신 장군이 13대 133의 대승을 이룬 울들목에서의 명량해전(1597. 9. 16) 후 작전상 후퇴(9. 21~10. 2)를 한 고군산도가 있다. 일본군은 이순신이 있는 진도를 넘어 서해를 넘보지 못했다. 섬과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을 보며 파도 소리를 듣는다. 섬에서는 물결만 천번 만번 밀려온다. 왕국의 흥망과 영화는 부질없다. 인간사는 무심히 해만 동에서 서로 갈 뿐이다. 오늘도 그런 하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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