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 옷차림을 AI에게 알렸더니 금세 찾았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 소식에 날로 발전하는 현대문명의 혜택이련만 엉뚱한 상상이 날개를 폈다. 나중엔 이 AI가 사람 얼굴만 보고도 심중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갖출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AI의 심리 인식 능력은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 및 인간관계에도 실로 유용할 듯하다.
불신 시대에 살아서인지 가장 중요한 사람다운 덕목은 신뢰와 신용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평생 반려자일 경우엔 더더욱 인성이 중요 하다. 그럼에도 사람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남녀가 연애 할 때는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기세가 아니던가. 이런 마음이 평생 변함없을지는 얼굴만으로, 혹은 몇 년 겪었다고 하여 확신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긴 항심(恒心) 및 진정성을 기대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일은 요즘처럼 각박한 세태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어 서다. 눈앞에 놓인 사소한 이익 앞에서도 의(義)와 정(情)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기 일쑤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인간 마음은 무게도, 냄새도, 형체도 없으므로 예측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속담 또한 ‘천길 물 속 깊이는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고 일렀으랴. 특히 변덕이 심하기론 여자 마음을 손꼽기도 한다. 이를 두고 문지방 넘어갈 때와 넘어와서 달라지는 게 여인이 지닌 마음이라고 했던가. 누구나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는 독심술을 지녔다면 얼마나 좋으랴. 이런 변심(變心)도 쉽사리 알아 챌 수 있잖은가.
하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우리로선 더구나 상대방 마음을 온전히 알아채기란 불가능 하다. 한 이불을 덮고 수 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 사이도, 심지어 자식들 마음도 간파 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하기에 걸핏하면 부모가 어린 자식을 죽이고,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관계성 살인이 빈번이 일어나는가 보다. 이런 세태를 사노라니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이 맞는 성 싶다. 대부분 이런 사람들 얼굴을 보면 첫인상이 평범하다. 얼굴만으로는 천륜을 저버릴 만큼 극악무도함과 잔인성을 지녔다는 것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흔히 염치없는 언행이나 무례함을 저지르고도 낯 뜨거워 하거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서 “낯이 두껍다.” 라고 말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역시, “ 두 개의 얼굴을 지녔다.” 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비슷한 비유로 쇠에 비유한 ‘철면피’도 있다. 더 심한 말로는 “인면수심(人面獸心)”도 있다. 즉 이 말은 얼굴은 사람의 탈을 썼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은 흉악함을 의미하잖은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주위로부터 이러한 말들을 듣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뉴스를 도배하는 온갖 불미스러운 소식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낯이 뜨겁다. 누구보다 청렴과 법을 준수해야 할 사람이다. 하지만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명품을 비롯 귀금속에 자신의 영혼을 팔은 높은 신분의 여인도 있다. 또한 물질에 현혹돼 부정부패를 저지른 정치인도 있다.
한 때는 이 여인을 텔레비전에서 대할 때마다 비록 성형 미인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예쁘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탐욕에 의한 잘못을 저지르자 왠지 그 곱던 얼굴이 갑자기 천박해 보였다. 돌이켜보니 진정한 미는 외형적인 게 전부가 아니었다. 내면이 맑고 향기로워야 한다. 이는 아마도 오장육부의 기운이 얼굴에 집약되어서 일게다.
  이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려니 가수 윤연선이 부른 ‘얼굴’이라는 노래 가사가 문득 생각난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위 노래 가사는 첫 곡부터 무심코 동그라미를 그리려다가 사랑하는 이 얼굴을 그린다는 내용이다. 또한 연인 얼굴을 그리며 향한 그리움도 표출하고 있다. 필자는 이 노래 가사와는 상반되게 이즈막 텔레비전 뉴스를 도배하다시피 하는 얼굴을 보며 한편으론 걱정스러웠다.
  노파심에서인가. 혹여 그들이 외출 시 까마귀가 머리 위를 낮게 날면 주의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까마귀가 뉴스 속에 등장하는 위정자들을 용케 기억했다가 어디서든 알아채고 음산한 울음소릴 내며 창공을 높이 날아오른다면 얼마나 당황하겠는가. 까마귀이지만 사람 얼굴을 잘도 기억해서다.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는 사람들인데 어찌 미물인 까마귀인들 이 들을 몰라볼 수 있으랴. 까마귀에 이어 까치도 낯선 사람을 기억한다. 까치는 전형적으로 영역을 방어하는 텃새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시끄러운 경계 음을 내는 게 이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까치가 심히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까치에 비해 까마귀는 불길한 징조의 새여서 길조(吉鳥)로 꼽지는 않을 터. 그래서 머리 위 까마귀를 조심할지어니.
그러고 보니 이들이 벌인 옳지 않은 행위를 비판만 할 일이 아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까 보다. 그래 전(前) 미국 대통령 링컨의 말처럼 자신 얼굴에도 책임지는 성숙한 삶을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