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불사이군 열녀 불갱이부'는 선비의 지조와 여인의 정조를 강조하는 시대의 표상이다. 전국시대 제나라 왕촉은 연나라 악의 장군의 투항 권유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고 말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말은 길재 야은이 이방원의 벼슬권유에 왕촉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알려졌으며 야은은 이방원의 배려로 충돌없이 구미로 낙향해 세종 원년에 일생을 마첬다.
지조와 정조를 재단하는 문제는 불사이군과 불갱이부의 유효(?)기간에 달려있다. 세습과 양위가 아닌 정변이나 왕조의 변화에서 나말여초의 상황은 신라의 납토로 인해 불사이군에 따른 고려왕조와의 갈등을 찾아볼 수 없다.
문제는 고려말 위화도 회군으로 이씨 정권이 부상하고 새 왕조가 들어섬에 따라 갈등을 겪게된다. 이색 정몽주 길재를 비롯 두문동에 은거했다는 고려의 신하들은 왕조의 변화를 부정하고 벼슬을 버리고 불사이군을 실천했다.
반면에 하륜을 비롯한 대다수는 새 왕조에서 벼슬을 함으로써 이들을 두고 충신이냐 변절자냐로 후세의 평가가 갈리고 있다. 이후 조선왕조는 세조의 계유정난과 단종복위 문제로 피바람이 불어 왕의 정체성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조선왕조를 반대했던 신하들도 자식들은 조정에 출사한 것을 볼 때 신하들의 지조는 당대의 군신관계를 재단하는 가치관의 문제였다. 때문에 충신의 지조는 누구를 위한 지조냐에 따라 명암을 달리한다.
이름난 충신들은 개인에 대한 절의가 아니라 국가와 명분에 대한 자기철학을 지킨 인물이다. 당태종의 신하였던 위징은 충신이 되기보다 양신이 되기를 원했다. 양신은 군주에게 거룩한 천자라는 칭호를 안겨주고 자신도 이름을 얻는 신하다.
반면에 충신은 군주에게 폭군이라는 오명을 안겨주고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몰살당하고 자신의 이름만 후세에 남겨질 뿐이다. 정도전과 하륜의 행적과 성삼문과 신숙주의 행적을 보면 신하의 절의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반면에 여인의 정조는 고려 이전에는 남편 생전으로 한정해 남편이 죽은 이후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진지왕이 자색이 고운 민가의 유부녀인 도화녀를 욕보이고자 하니 도화녀가 지아비가 있는데 어찌 두 남편을 섬기느냐며 거절한다.
왕이 남편이 없으면 몸을 허락하겠는가 하니 가능하다고 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불갱이부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고려 후기부터 강요되기 시작해 여인의 삶을 옥죄어 왔다.
조선 세종때는 효자 충신 열녀 각각 110명을 가려 찬시를 붙혀 간행한 삼강행실도를 제작해 충효와 여인의 절개를 강조했다. 또 성종 16년에는 재가녀자손금고법이 제정되어 자식들은 과거조차 금지될만큼 여인에게 일부종사를 강요했다.
하지만 오늘날 불갱이부는 한때의 풍속으로 전락해 가치를 상실했고 새로운 성풍속도를 낳고 있다. 불사이군 역시 정치철학이 아니라 특정인에 대한 충성만이 승진이나 자리에 대한 보은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공직에 몸 담았다 퇴직하면 남는것은 명예뿐이다. 공직자는 남이 알아주던 않던 자신이 살아온 행적에 대해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비난은 받지 않아야 한다.
선거로 당선된 선출직의 입맛대로 규정을 해석하고 억지로 꿰어 맞추는 업무태도는 충성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배신이다. 약삭빠른 처세술로 친구도 잃고 후배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되어 주민들에게까지 빈축을 사는 투명인간은 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정치인이라면 충성의 방향은 특정인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