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뜻은 옳은 것인가 그런 것인가. 하늘의 뜻이 과연 있는 것인가.
하늘의 뜻이 있다면 왜 도척과 같은 악한 자는 잘먹고 잘살아 천수를 누리며 백이 숙제와 같은 고절한 선비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어야 하는가. 나는 나쁜짓을 하지않고 평생을 성실 근면하게 살았는데 삶이 팍팍하고 남을 해꼬지하고 괴롭히고 약삭 빠르게 살아온 자는 어째서 풍족하게 사는가. 누구나 한번쯤 품게되는 의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같은 삶의 진솔하고 불편한 진실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공자가 하늘을 원망말고 남을 탓하지 말라는 불원천 불우인(不怨天 不尤人)이라고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허한 소리로 들리고 현대인의 생활속에서 와닿지 못하는 '공자같은 소리하고 있네'로 귀결되고 만다.
사마천은 사기 열전의 첫머리를 백이숙제 열전으로 시작하면서 천도시비를 거론하고 있다. 왕의 미움을 사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처했던 자신의 상황에서 천도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하늘의 뜻이라는게 모호하고 드러낼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우리들 삶에 녹아 있는 것이다.
질서와 선을 권장하는 인류의 관습이 권선징악이라는 이름으로 흘러오다 급기야 통치자의 선전용으로 녹아들어 인간을 옭죄고 있다. 세상은 권선징악이 아니라 운이 좋거나 힘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는 힘 싸움이며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는 것은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악한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고 언젠가는 전부 벌을 받는다는 일반화의 오류를 철석같이 믿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이다. 권선징악의 본질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이며 '필요자'에 의해 인류의 규범으로 제시한 방편에 불과하다.
노자는 도의 정의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고 인간 최상의 선은 천도 즉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또 하늘의 도는 특별히 편애함이 없지만 늘상 선한 이와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고 해 고루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천도가 존재한다면 왜 의인은 수난을 겪고 악인은 부귀영화를 누리는가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 천도에 대한 도가와 유가의 입장은 천하의 도를 구제할 처방이 있는가 없는가로 달라진다.
노자의 천도는 선과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야 하며 유가에서 강조하는 인(仁)이라는 자체가 강요와 억압으로 작용해 오히려 천도에 어긋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유가는 인을 추구하는 적극성을 통해 천하를 구제할 수 있지만 도가는 천하를 구제할 처방이 없다고 보고 있다. 공자의 키워드인 仁의 등장은 예와 인을 통해 덕치를 펴야 한다는 주공단의 입장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후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 가미되고 한유에 의해 유학이 정립되고 주돈이와 주희를 거쳐 유학을 근본으로 하는 성리학이 조선 5백년의 주류사상으로 자리잡으면서 천도시비는 금기사항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사마천이 개탄한 현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철학이 없는 자가 선출직이라는 미명하에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춤으로 세상은 요지경이 되어 천태만상을 연출하고 있다. 법의 공정성이 무너지고 있는 오늘의 상황은 법치에 의한 통치만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
피의자는 한결같이 성실하게 검찰조사에 응하겠다고 하지만 그러한 자신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그림자가 어련거리고 있다. 돈만 주면 영혼까지 팔아먹는 대형로펌과 호화군단의 변호사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한비자의 법치가 시대적인 여건으로 배척받았지만 법이 공정하지 못하면 독재자가 발호하고 약삭빠른 인간들의 천국이 된다. 천도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새삼 사마천을 소환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