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경주는 천년고도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세계 무대에 서게 된다. 신라 왕경 도시가 APEC 정상회의를 맞는 일은 경주의 자부심이자, 값진 국가적 기회이다. 그 가운데 만찬장은 APEC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각국 정상과 대표단이 한자리에서 식사를 나누며 교류하는 자리, 그래서 장소가 곧 메시지가 되고, 공간이 곧 외교가 된다.그런데 만찬장이 이제껏 계획되던 박물관신축공간에서 호텔 연회장으로 변경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쉬움은 ‘장소 바뀜’의 사실만은 아니다. 개최도시 늑장 결정, 초기 장소선정 우왕좌왕, 나아가 건축적 구현이 갖는 상징성과 의미가 퇴색한 현실이다.경주국립박물관 만찬장은 식사 공간을 넘어서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신라의 향기를 만찬에 담아내는” 개념은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외교 언어로 풀어내려는 시도이다. 정상과 대표단은 그저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경험하며 신라의 기억과 숨결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호텔로 최종 결정되었다. 호텔은 전문적인 주방과 서비스 시스템을 갖추었고,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는 데에 분명 유리하다. 하지만 공간이 전달할 수 있는 역사 문화적 메시지는 옅어진다. 만찬장이 신라의 격조를 보여주는 무대가 아니라, 기능적 편의성이 우선한 식탁이 되는 것이다. 이번 변경의 주된 요인은 ‘수용인원 증가’에 있다. 애초 250명 규모로 기획된 만찬이 700명으로 확대되었다. 3배에 가까운 증가 폭은 박물관 뜰 공간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인원 확대는 국제회의의 위상과 성격을 고려할 때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이 과정이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행정 조정력 발휘로 당연시된 점이다. 결국 박물관이라는 문화적 공간은 제외되고, 호텔이라는 상업적 공간이 남게 된 것이다. 많은 보도는 “화장실이 없다.”, “주방 면적이 부족하다.”고 다루었다. 그러나 이는 본질을 가리는 설명이다. 화장실이나 주방은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회랑으로 본관과 연결하고, 케이터링을 위한 배선 주방을 마련하면 풀릴 일이다.문제의 본질은 ‘개념의 혼선’과 ‘조건 변화의 불투명함’에 있다. 중요한 논점이 건축의 본질이 아닌 물리적 결함으로 축소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경주는 국제행사를 치를 여건이 미흡하다.”는 부적절한 낙인까지 감수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보다 근본적 문제가 있다. 개최도시 늑장 확정과 만찬장 장소 결정의 혼선은 기획과 실행 단계의 추진을 매우 급박하게 만들었다. 장소를 월정교, 호텔, 동궁 월지, 동부사적지, 혹은 박물관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건축적 개념을 제대로 발현시킬 시간은 사라져버렸다. 촉박한 사정은 결국 관련 건축물의 임시시설화를 초래하였다.건축은 개념과 시간, 실행의 합작이다. 그런데 개념은 무뎌지고, 시간은 부족했으며, 실행은 급히 되었다. 국제행사라는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었던 건축적 품위는 그렇게 희생되는 것이다. 신라문화 정체성의 약화는 지역의 자긍심뿐 아니라, 국제적 브랜드 가치의 손실이다. 외신 기자가 언급할 “경주 A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만찬”이라는 표현은 “신라의 풍광을 녹인 박물관 만찬”에 비하여 별다른 울림이 없다. 더하여, 박물관 내 만찬장은 APEC 이후에도 전시 및 문화행사, 국제 컨퍼런스 공간으로 남을 수 있으나, 호텔 연회장은 행사 이후에 지역자산 가치로 환원되기 어렵다. 이번 논란은 장소 변경이라는 단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행사 준비에서 개념설정, 조건 변화, 절차 투명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운다. 앞으로 국제행사를 유치할 때, 지역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 개념을 우선시켜야 하겠다. 조건 변화는 사전에 충분히 공유되고, 사후 활용까지 고려한 건축적 구상도 필요불가결하다. 2025 경주 APEC 만찬 행사는 호텔에서 열린다. 그러나 이 결정이 남긴 논란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국제행사를 준비하는 방식에 깊은 교훈을 준다. 신라의 향기를 전하지 못한 아쉬움은 경주가 다음번 더 큰 무대를 준비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행사가 지나가면 건축물이 남는다. 그리고 건축은 도시의 얼굴이 된다. 이번 논란이 단순히 ‘만찬의 장소 변경’으로만 기록되지 않고, 우리 건축과 도시가 가져야 할 철학과 태도를 되새김질하는 계기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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