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은 이제 단순한 전화사기가 아니다. 첨단 기술과 국제 조직이 결합한 신종 금융범죄다. 최근 5년간 피해액이 4조원을 돌파하며, 과거 15년간 누적 피해를 단숨에 추월했다. 지자체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 매년 범죄자들의 손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셈이다.하지만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사건 발생 뒤 피해자 진술을 받거나 검거 성과를 발표하는 ‘사후 대처’에 머물고 있다. 그 사이 범죄집단은 AI 음성합성, 가상번호 변작, VPN을 이용한 추적 회피 등으로 기술을 고도화하며 더 교묘하게 피해자를 노린다.현장에서 만난 한 60대 피해자는 대출 빙자 사기에 속아 평생 모은 퇴직금을 잃었다. 그는 “은행 직원인 줄 알고 믿었다. 화면도, 목소리도 너무 진짜 같았다”고 울먹였다. 피해자에게 돌아온 것은 빚과 절망뿐이다.고령층 피해는 지난해보다 80% 넘게 늘었다. 스마트폰과 앱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이 특히 취약하다. 하지만 예방 홍보는 온라인 배너와 공익광고에 치중돼 있어 정보 격차가 큰 이들에게는 거의 닿지 않는다. 마을 방송, 경로당 교육, 읍면동 직원의 직접 안내 같은 ‘발로 뛰는 예방’이 필요하다.금융당국과 통신사는 피해 방지의 최전선이지만, 여전히 ‘권고’ 수준의 협력에 머물고 있다. 의심 계좌와 번호를 실시간 차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도 개인정보보호 규제와 책임 부담을 이유로 적극적인 차단을 주저한다. 법과 제도가 기술보다 느리게 움직이면서 범죄자들이 허점을 파고드는 현실이다.피해금 환급 절차도 지나치게 복잡하다. 피해자가 은행과 경찰서를 오가며 증빙을 내는 동안 돈은 이미 해외로 빠져나간다. 최소한 긴급 동결과 생활비 지원이 가능한 신속 구제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을 더 이상 금융사기로 취급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국가의 통신·금융망을 교묘히 악용한 사이버 테러 수준의 범죄로 규정하고, 국경을 초월한 국제 공조와 정보 공유 체계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집중된 콜센터를 무력화하려면 양국 간 사법 공조를 넘어 외교적 압박과 민관 합동 기술 추적이 병행돼야 한다. 국내 수사기관의 단속만으로는 국외에 있는 조직을 근절할 수 없다.범죄의 진화 속도에 대응하려면 AI 기반 탐지 기술, 금융거래 이상 패턴 조기 경보 시스템, 음성 합성 탐지 솔루션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동시에 메신저 피싱에 취약한 청소년과 노인층을 위한 맞춤형 교육을 의무화해야 한다.한편, 국민 개개인의 인식 변화도 중요하다. ‘나는 속지 않는다’는 자만은 금물이다. 경찰과 금융당국이 제공하는 신고 앱과 차단 서비스를 적극 활용하고, 의심이 들면 즉시 신고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범죄자들은 법과 제도의 빈틈뿐 아니라 사람의 심리적 취약점을 파고든다. 공포심, 조급함, 탐욕을 자극해 합리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 결국 보이스피싱과의 싸움은 제도·기술과 함께 사회 전체의 경각심이 결합될 때 비로소 이길 수 있다.정부와 국회는 더 이상 ‘대책 발표’에 그쳐선 안 된다. 실효성 있는 법·제도를 마련해 통신사와 금융사가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하고, 피해자 구제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보이스피싱 피해가 5년 만에 4조원을 돌파한 현실은 우리 사회의 대응 체계가 여전히 시대에 뒤처져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이 빠르게 진화하는 만큼, 정부의 대응 속도와 범죄 예방 전략도 그보다 앞서야 한다.국민의 재산이 털린 뒤의 뒷북 대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하루하루 생계에 직격탄을 맞고, 범죄 조직은 그 사이 또 다른 범행을 준비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사전 차단과 신속 대응’이다.ICT 안보를 위협하는 보이스피싱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정부가 주도해 금융·통신사·지자체가 긴밀히 협력하는 다층 방어망을 구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통계도 더 암울한 기록으로 채워질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