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넘어오면서 보니 엄청난 산불에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대피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타버린 나무들은 벌채 후 트럭에 실려 반출되고 있었다. 그 우람하던 여러 채 고택들은 보이지 않고 빈터는 검은 천막으로 덮여 있다. 명가 탐방 취재 기획을 구상하면서 제일 먼저 찾은 지촌종가 종손 김원길 선생 댁은 의성김씨 지촌선생 자손들이 4백여 년 살아온 지례예술촌(지촌종가, 안동시 인동면)으로 풍광이 수려하고 사계절이 아름다워 많은 내외국인이 찾던 곳이다.
지촌(芝村)은 종손 김원길 선생의 13대 할아버지 김방걸(金邦杰)선생이다. 그의 문집 서문에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공이 ‘영남제일인자(南中第一流)’라 할 만큼 칭송이 자자한 분이다.조선 숙종조 기사환국 때 남인의 대표였던 그의 상소문은 능히 임금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영남을 구한 인물로 평가된 분이다. 격조 높은 시를 후세에 많이 남김으로써 예술촌 내에 지촌 문학관을 만든 연유가 되기도 한 인물이다.1985년 문화재로 지정된 후 1990년 문화부가 지정한 아시아 최초의 예술인 집단 창작 마을(Artist's Colony)이 지례예술촌이다. 한국 유수의 인공댐인 안동호 조성 시 수몰 위기의 문화재를 옮겨 주인이 직접 살면서 국내외 예술인들에게 한옥, 한식, 한복, 한지, 한글, 한국음악 등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해 왔다.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되고 전 세계에 알려져서 2007년엔 정부로부터 옥관 문화훈장을 수훈하고 2017년엔 대한민국 한류 대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3월 25일 안동지방을 휩쓴 산불로 일부가 소실된 지례예술촌은 칸수로 125칸이었으니 그야말로 국내 최대 규모 한옥박물관 급이었다. 지촌종택 건물 6채, 제청 3동, 서당, 사당, 별 묘, 주사채, 행랑채, 방앗간, 곡간, 마구간, 화장실 등 총 10동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번 산불에 사당과 제청을 남기고 8동은 모두 타버렸다.
김원길 선생은 “건물은 국가유산이므로 전부 복원해 주는데 내년 3월 이후에나 착공할 것”이라고 했다.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김원길 선생 가족은 이재민용 이동주택에서 지내고 있었다.불탄 건물은 1980년대에 임하댐 수몰을 피해 이 자리에 옮겨 놓은 건물들인데 물을 피해 옮긴 것들이 이번엔 불을 맞은 셈이다. “혹시 두 번의 재난을 겪으시면서 이곳이 살 곳이 못 된다거나 하늘이 떠나란 계시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진 않으셨는지?”라는 물음에 “떠나고 싶으면 그런 생각이 들겠죠” 단호하다. 이 기회에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여기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 조상께서도 여기가 좋아서 터 잡은 곳이고 더욱 많은 장점이 있는 곳이라 강조한다.
전해오는 시에 “三秀古里/ 九曲上流/ 千載一遇/ 一生淸福 지초꽃 피는 옛 마을/ 아홉 구비 물길 위에/ 예서 삶은 희한한 일/ 일생이 복되다오”라 했지요. 예술창작 마을을 만든 계기도 지촌 선생 후손들의 고향이었고 대대로 더 짓고 지켜오던 건물들이어서 이의 유지관리를 위해서라고 했다. 김원길 선생 본인도 국내 유명 시인이어서 더 애착을 가졌을 듯싶다.왜 하필 예술촌을 만드셨는지의 물음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경관이 예술인들의 작업 공간으로 적당할 거라 생각했고, 본인도 많은 명인과 교유할 수 있겠단 생각이었다”고 했다. 미국엔 이런 곳이 여러 군데 있지만, 아시아에선 자신이 최초였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에서도 이곳을 베껴서 ‘예술촌’이란 명칭을 쓴 곳이 생겨났다고 했다.원래 지촌 종가에서 갑자기 ‘예술촌’으로 탈바꿈할 때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없었나요?김원길 선생은 “‘지례예술촌’은 ‘지촌 종가’를 유명하게 할 수 있지만 지촌 종가는 지례예술촌을 유명하게 만들지 못하니까요. 예술촌은 글로벌하게 만들 수 있지만 지촌 종가는 글로벌할 수 없지요. 전 세계 어느 누구도 예술촌을 찾아 지례로 오지 지촌 종가를 찾아 지례를 오진 않아요. 그들은 지례를 와서야 지촌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해서도 알게 되니 종가로 예술촌 만든 건 어떤 반대가 있어도 했어야 했지요"라면서 "나는 세계로 나가고 싶었고 나의 조부도 아버지도 찬성하셨어요. 농토가 몽땅 없어진 판에 우리가 관광수익으로도 살 수 있겠다는 걸 일찍부터 아셨지요. 들은 척도 않던 정부만 10년 늦게서야 그 가치를 알고 전국의 고택뿐만 아니라 한옥으로 생긴 건 모두 ‘고택체험업’을 하게 했지만요”라고 했다.
산불 피해 보상은 제대로 받게 됐는지라는 물음에는 “무슨 특별법인가 뭔가가 통과되어야 준다기에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벌써 반년이 지나도록 계류 중이라니 경제적인 고통도 많다”고 했다.건물을 복원할 때는 건물을 쓸모 있게 지어주면 좋겠다고 한다. 아무 쓸데없는 방앗간과 마구간을 복원하면서 정작 필요한 식당과 응접실은 안 지어준다고.화장실을 문화재 공법으로 지어야 한다며 1억씩 들여 먼 산 밑에 지어주니 손님들이 주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데 제발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한다. 말로는 사람이 제일이라면서.화장실 하나에 1억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되묻자 “남녀 두 칸이지요” 게다가 자부담 20%는 주인이 내야 한다고 말했다. 불탄 후에 보니 문화재 공법으로 지은 화장실도 아니었다. 벽체를 시멘트 벽돌로 쌓은 흔적이 보인다. “이번에도 저 자리에 그대로 복원해 놓겠지요” 혼잣말처럼 되뇌는 모습에 짠함이 느껴진다.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단풍나무, 편백 등을 심어 사람들이 보러오게 하고 숲속엔 군데군데 명상 쉼터를 만들어 사람들이 조용히 다녀가게 하고 싶다는 그 계획에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