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한국이 처음으로 주최하는 다자 정상회의다. 미국,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 21개 국가의 정상들이 모이는 대규모 외교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정부는 계엄과 탄핵 국면 이후 ‘국제사회 복귀’를 선언하는 상징적 외교 무대라는 점에 의의를 두고 경제 협력, 인공지능(AI) 협력, 공급망 안정, 기후 대응 등 글로벌 의제를 주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다자 외교무대에 오를 주요 국가 정상들의 회의 참석 여부가 불투명해진 가운데 한국이 얻어 내고자 하는 외교적 성과가 얼마나 클 것 인가 하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현재 검토되고 있는 일정대로라면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방문 후 당일 또는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 중국 정상과 약식 회담을 진행하고 APEC 정상회의에 불참한 채 한국을 떠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다자 외교를 통한 국제협력을 도모하고자 하는 한국의 구상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될 수 있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이 시 주석과의 회담을 위한 ‘원포인트 일정’으로 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통상적으로 미국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을 연달아 방문할 때는 통상 일정의 균형을 고려하지만, 일본에서는 특별한 현안이 없음에도 2박 3일간 머무는 반면 한국에서는 APEC이 열리는데도 불구하고 본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한미 동맹 관계의 균열이 발생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트럼프 대통령이 본 행사에 불참하면 APEC 정상회의의 무게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의 한국 체류 일정이 줄어들 경우 한미 정상회담도 심도 있는 회담이 이뤄지지 못한 채 약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고, 조선 협력 차원에서 추진 중인 우리 조선소 방문 일정도 불확실해진다. 교착상태인 한미 관세 후속 협상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정상회담이 짧은 회담에 그칠 경우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 입지 역시 좁아질 수 밖에 없다.주변 강대국 간의 통상 문제도 녹록하지 않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통제’로 미국과 맞서고 있고이에 대응, 미국은 ‘대중국 관세 100% 인상’ 카드로 충돌하고 있다. 특히 중국이 트럼프 미 행정부의 고율 관세 부과에 맞서 희토류에 이어 고급 리튬이온 배터리와 인조 다이아몬드 수출 통제를 시행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등 중국이 또 다른 압박 카드를 내밀면서 미국의 추가 대응이 나올 수도 있다.이런 가운데 일본마저도 대미 협상에서 트럼프 임기 내에 미국의 특수 목적 협력기구에 5,500억 달러를 투자하고 그 이익금은 미국이 90%를 가져간다는 굴욕적인 협상안을 제시 받았다. 한,미 통상협상에 교훈을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정부가 명심해야 할 점은 상대가 우방국인 미국이라 해서 불합리한 제안에도 합의해 줘야 한다는 무책임한 태도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지난 8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피스메이커(peacemaker)'를 맡아주면 '페이스메이커(pacemaker)'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가 절실하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 의제 자체를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돌파구 마련이 쉽지 않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 자체가 트럼프의 짧은 방한 일정으로 무산될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이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 역할 역시 무산된 듯 하다.이 시점에서 다자외교의 첫 시험대에 오르는 이 대통령의 과제는 무엇일까. 멀지 않은 캄보디아에서는 주 캄보디아 대사도 임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인이 숨지거나 실종되는 사례가 올해에만 400~500건이 발생했다. 이 대통령은 총력 대응하라고 지시했지만 저들이 언제 구츨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이번 정상회의 의제에 “국제 범죄조직과의 전쟁“이라도 추가해야 할 만큼 위험한 처지이다.이러한 외교적 난국 앞에 이 대통령은 검찰 개혁, 사법 개혁 등 국내 정치에 눈 돌릴 틈이 없다. APEC 회원국들에게 대한민국의 경제 입지를 홍보하고 투자 유치를 최대한 확보해야 하며 한미 관세 협상, 북·중·러 연대에 따른 신냉전 시대에 맞선 보다 폭 넓고 정교한 외교적 대응 전략 수립이 절실하다. 중국 정부는 지난 14일 미국의 중국에 대한 해사, 물류, 조선업 분야의 조사에 협조한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다섯 곳을 겨냥한 제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른바 ‘줄을 잘못 서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실질적인 피해는 미미할 것이라는 업계의 전망이 나오지만 미중간 자존심 대결에 낀 한국의 딜레마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과 다름 없다.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표방해 온 이 대통령이 APEC을 계기로 마주 앉는 미국, 중국 등을 비롯한 회원국 정상들과의 회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면서도 실익을 얻어 내는 묘책이 필요하다. 특히 미·중 기싸움 때문에 APEC의 흥행에 빨간불이 들어 오지 않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흔들림 없이 수행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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