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에게 휴일은 솜사탕 같다. 열심히 일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다시 회복시키는 매개체다. 이 중 가장 긴 휴일은 한가위와 설날로 3일 연휴다. 다른 휴일이 하루임에 비해 얼마나 긴 휴일인지 알 수 있다. 휴일이 이렇게 정해진 데에는 물론 한가위와 설날이 다른 휴일에 비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 한가위 연휴는 사상 최대로 긴듯했다. 한가위를 맞아 많은 사람이 가족과 친척과 만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맛난 음식도 함께 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입은 두 역할을 동시에 잘 해낸다.    즉 말하면서 먹는 것을. 이러한 것들은 행동(behave)이다. 그 행동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행동을 일으켰을까? 이것은 근육에 지시를 내리는 뇌에서 비롯된다. 뇌의 특정 영역에서 신경전달물질, 신경회로(뉴런)가 작동하며 나타난 결과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세계의 역사는 적어도 절반은 사랑의 역사”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해도 될 듯하다. ‘세계의 역사는 적어도 절반은 배신의 역사’일 것이다. 사랑과 배신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이는 피아(彼我, friend or foe)로 발전하게 된다.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으로부터 일만 이천 년 이전의 수렵채집사회에서 인간이 사냥할 때,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면 그것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동물인지, 아니면 식량감인지 구별하는 것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이를 구별하는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진화의 측면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는 당연히 보수적인 선택을 했으며, 그 결과 지금의 여러분이 저와 함께 현재의 시간대에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이런 신경계의 작동은 매우 짧은 시간, 약 1초 이내에 벌어져서 영향을 미친다. 엄청난 속도다. 우리의 뇌가 이렇게 진화해 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사자가 우리 옆에 느닷없이 나타나서 우리를 쫓아온다. 당신의 뇌에 있는 편도체가 활성화되면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다리 근육의 혈관을 확장하며 감각이 최대한 날카롭게 느껴지도록 한다.    만일 우리의 뇌가 하루 뒤에 그런 지시를 내렸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치명적인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뇌의 빠른 작동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빠른 시간에 뇌가 작동하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것들의 예는 무수히 많다. 누구의 어떤 행동을 오해한다든지, 잘못되었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모든 것을 이런 방식으로 처리한다.    ‘내 생각은 옳고 너의 생각은 잘못됐다.’라는 생각을. 이 생각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피어오른다. 하지만 신형철은 덧붙인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 아니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비난하기는 쉬워도 공감하기는 어려운 인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조직인 직장에서 이런 일들이 만연하다면? 만일 조직이 이렇다면, 조직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를 향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일터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을 위주로 에너지 사업을 하는 한수원 시설의 보안을 책임지는 시큐텍(주)의 구성원이 어떻게 해야 함은 자명하다. 서로 반목하고 시기할 것이 아니라 도와가며 일해야 한다.    이러한 일의 결과, 예전 수렵채집사회에서 사냥감을 잡아 공정하게 배분한 것처럼 우리의 조직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르며, 건전한 기업이면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정의(正義, Justice)의 개념은 바로 이렇게 ‘공정한 배분’에 기원하고 있다. 독일의 작가 플로리안 일리스는 책 「증오의 시대, 광기의 사랑」에서 사랑의 열정과 냉정을 함께 선보인다. 600여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 동안 실존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사르트르와 시몬 보부아르, 토마스 만, 한나 아렌트, 피카소 등 당대의 쟁쟁한 사람이다.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보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와도 같다. 이렇게 역사상 위대했던 사람들도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누구나 불완전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완전함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 불완전함이 인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마주하면 완전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진화 동력이 점점 상실해 가고 있지 않나 두려움이 인다. 점점 증오의 시대로 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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