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불국사 하면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청운교와 백운교를 떠올린다. 자하문을 오르는 계단을 두고 다리라고 했다. 건립 당시에 구품연지라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기에 연못위로 계단을 설치해 다리라고 이름지었다고 보고있다. 문제는 아랫쪽 18계단과 위쪽 16계단을 두고 다리 이름을 백운과 청운으로 달리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해설사에 따라 다리의 명칭이 다르며 일부는 청운인지 백운인지 알 수 없다고 얼버무리고 만다. 국보 23호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이름조차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는 올바른 역사해설이라 할 수 없다.향토사가들도 의견이 달라 하청운 상백운이라거나 하백운 상청운이라고도 하지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다리의 명칭에 도교와 관련 승선교 능파교라고 하듯이 청운과 백운도 그 연장선으로 보기에 위가 백운교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또다른 향토사가는 불교와 도교의 접목은 언어도단이며 사찰 건립 기록이라야 역대기밖에 없는 상황에서 칠보교가 위쪽이듯이 청운교가 위쪽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빈약한 자료이지만 유적이 남아 있다면 실제를 판별하는 방법은 과거의 기록들을 대비해 보면 논리적인 설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1767년 불국사를 유람한 박종이라는 선비가 쓴 동경유록에는 명확히 아래가 백운이며 위쪽이 청운교라고 했다. 백운은 18계단이며 길이 22척인 세개의 사석을 계단 중앙과 좌우에 나누어 놓았고 계단 참은 너비가 6척이며 아래는 홍예로 받치고 있다고 했다. 또 청운은 16계단이며 사석은 길이가 15척4촌이며 계단이 끝나는 곳에 자하문이 서 있다고 했다. 당시 난간 기둥의 돌구멍 흔적은 있으나 난간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하문앞까지 말을 타고 왔다고 했고 연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외에도 오늘날 범영루인 수미종각에 대해 자하문 서쪽 10보쯤에 있다는 설명과 함께 누각의 위쪽에 매월당 김시습의 퇴어시를 새긴 현판이 있었다고 했다. 또 자하문을 중심으로 동쪽 10보쯤에 동경루가 있고 안양문의 서쪽으로 10보쯤에 서경루가 있다며 다보탑과 석가탑 대웅진 무설전까지 기록하면서 회랑은 없었다고 했다. 마치 오늘날 역사학자들의 유적조사 기록을 연상할 만큼 불국사의 전경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반면 임진왜란 이전인 1580년에 불국사를 유람한 이덕홍의 동경유록에는 석탑 불상 그림 등 천여칸에 달하는 사찰이라 했고 자하문 아래에 연지가 있었다고 했다. 1688년 불국사를 찾은 정시한은 그의 산중일기에서 동으로 빚은 큰 불상 두개가 있었으며 좌우의 회랑은 수십간이었다고 했다. 박종이 보았던 동경루는 오늘날 좌경루로 수미종각은 범영루로 복원돼 우경루라 부르고 있으나 당시에는 수미종각이었고 안양문 서쪽에 서경루가 들어서야 우경루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유적 안내판에도 박종의 답사기대로 상단을 청운교라 하고 하단을 백운교라 설명하고 있다. 이는 1740년대 쓰여진 불국사고금역대기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불국사고금역대기는 불국사의 창건과 임란이후 중수과정 등을 기록한 것으로 1740년 귀은이 지은 것을 1767년 제자인 만연이 필사한 책이다. 일제때 국내에서도 필사했고 1923년 일본 동대사에서 불국사고금역대기를 그대로 필사한 것이 불국사고금창기로 불러지고 있다. 이 책은 비록 불교의 진흥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설화의 짜깁기라는 평가를 받지만 상청운 하백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제 논란은 종식되어야 한다. 결론은 위쪽이 청운교이고 아랫쪽이 백운교이다. 한편 불국사는 임란 이후 비로전이 1660년에 중수된 것을 비롯 1750년에 극락전이 1765년에 대웅전이 중수되고 수미종각 역시 1612년과 1688년 중수됐다.오늘날의 불국사 모습은 1973년에 대대적인 수리와 복원으로 정비된 것으로 통일신라때의 모습이 아니며 1767년의 모습과도 다름을 알 수 있다. 역사유적의 정비는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돈으로 치장하는 것보다 유적의 의미와 정신을 살려 국민이 함께 느끼고 호흡하는 역사현장으로 다듬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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