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오송엔 해마다 화장품 뷰티 산업 엑스포가 열린다. 올해도 ‘오송, k-뷰티의 중심에서 세계를 잇다’ 라는 주제로 2025년 오송 뷰티 산업 엑스포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 아모레 퍼시픽, 셀트리온스킨 큐어 같은 국내 대표 기업 뿐만 아니라 , 중국, 독일, 불가리아 등 해외 6개 업체도 참가하여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쳤다.
이 행사를 대하노라니 필자가 22세 때 처음 바른 화장품 종류가 떠올랐다. 크림 종류였다. 이것 한가지만 발랐는데도 필자 얼굴에 광택이 나고 매우 촉촉한 느낌이었다. 이후 일명 화운데이션이란 색조 화장품은 40대 초반에 처음 발랐다.
이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희고 탄력있는 피부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세수만 하여도 피부가 맑고 고왔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기초 화장품은 물론, 립스틱이나 분(粉) 따위도 바르지 않던 분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닌 자태가 매우 단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학교 운동장만 들어서도 먼발치서 선생님들이 교실 창문을 열어젖힌 채 목을 빼고 내다볼 만큼 복사꽃처럼 어여뻤다.
이는 충북 노은면에서 유명했던 한학자 따님인 외할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에 의해서이다. 옛날에는 양가집 규수나 여염집 여인들은 거의 화장을 기피했다. 아니면 눈썹이나 그릴 정도였다. 그 시절 화장품으론 백분, 혹은 동백 머리 기름, 입술과 뺨에 바르는 연지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주요 화장품으로는 분과 눈썹 먹이가 전부였다. 오죽하면 기생을 ‘분’과 눈썹 그릴 대 '자를 합친 분대(粉黛)라고 칭하였을까. 1920년 대 개화기 땐 유두분면(油頭粉面) 이라고 하면 화류계 여인이나 첩을 일컫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자 주부들은 물론. 심지어 여학생들까지도 얼굴에 화장을 하고 다닐만큼 화장품이 널리 퍼졌다. 이를 본 영국인 여행가 비숍 여사가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 책에는 “여인들이 서양 물이 잔뜩 들어서 매우 세련되고 짙은 화장을 했다” 라고 적혀있다. 이로보아 화장품이 개화기에 즈음하여 양반층을 비롯, 서민층까지 깊숙히 파고들었음을 미뤄 짐작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땐 문명 불빛이 제대로 켜지지 않은 시대였다. 화장품은 주로 밀수품이었다. 이 시절엔 중국과 일본을 통하여 밀수입한 외제 화장품이 여인들 얼굴에 아름다움의 꽃을 한껏 피워주었다. 이 밀수 화장품은 주로 기생이나 화류계 여성들이 애용 했다. 이 들은 중국, 일본 무역상에게 화장품을 구입했다. 
 
 국내 손님들에게 화대 대신 화장품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그들에게 유입된 밀수 화장품들은 방물장수들에게 되팔아 다시 고가로 여염집 주부들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특히 중국에서 밀수된 서양분은 일본에서 들어온 왜분(倭洋)보다 품질이 훨씬 월등하여 여인들이 매우 선호 하였다. 물론 가격도 왜분 보다 더 비쌌다.
그래서인지 기생 사회에서도 양분을 사용하면 1급 기생, 왜분을 쓰는 기생은 2급 기생으로 나뉘어 권번(券番) 기생들 등급 분류에도 화장품이 일조 했다. 특히 왜분을 쓰는 기생은 ‘왜분 기생’, 서양 분을 쓰는 기생은 ‘양분 기생’ 으로 불렸다. 현대처럼 국산 화장품이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는 세태에 사노라니 왠지 그 당시 기생들에게 연민마저 인다.
화장품 수요가 급격히 늘자 이에 착안, 국산 화장품 제1호가 나온 게 일제 강점기 때인 1916년 선보인 박가분(朴家洋)이 아니던가. 화장품 품목으론 총독부 관허 제 1호인 셈이다. 현, 두산 그룹 창업자 박두병 씨 부친인 박승직 씨가 그 창업자였다. 화장품을 논하노라니 문득 노래 한 곡이 떠오르는 것은 어인일일까.
김용임 가수가 부른 ’거울 앞에서‘ 라는 노래가 그것이다.
’거울 앞에 앉았다/이 낯선 여잔 누군가/거칠어진 손 주름진 얼굴 보니/괜히 눈물이 난다/남편 자식 걱정에 /나는 잊고 살았다/이제는 날 위해 살고 싶다/나는 소중하니까‘
거울, 그리고 화장은 여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 관계다. 위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리노라니 얼마 전 고인이 된 친정어머니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도 여자였다. 어머닌 생전 화장대 앞에 앉아서 어떤 마음을 지녔을까. 
 
모르긴 몰라도 어머닌 거울 앞에서 단 한번도 위 노래 가사와 같이 이제라도 자신 만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을 리 만무이다. 평생을 오로지 남편과 자식 위한 희생과 헌신을 당연한 본분으로 여긴 분이어서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 어머니 화장대 위에 놓일 화장품도 미처 골고루 챙겨 드리지 못한 게 못내 회한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