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고 분석해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아주 사악하고 악마적인 인물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매우 평범했다고 주장해서 나온 말이다. 홀로코스트, “그 엄청난 절대악의 현상은 평범성, 즉 ‘생각하기’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 ‘판단하기’의 무능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하며, 이를 통해 우리 누구라도 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체로 어떤 현상을 마주할 때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판단’하며, 마지막으로 ‘실행’한다(실행을 말로 할 경우 ‘말한다’라고 표현한다). 가령 회사 정년을 맞이하여 퇴직연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예로 들어 보자. 가장 먼저 퇴직연금의 종류, 대상, 연금 수급 시기 등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는데, 이는 생각하는 과정이다. 다음에는 이렇게 생각한 자료를 근거로 어떻게 할 것인지 판단 과정을 거친 후, 구체적으로 퇴직연금 운용 방안을 실행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느 하나라도 부실하다면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면 어느 한 과정도 부실하면 안 된다. 생명의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일을 하면서 나쁜 결과를 얻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이런 결과는 일하는 과정에서 소홀함으로 인해서 또는 알지 못해서, 즉 무능함으로 인해서 나올 수 있다. 소홀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소명(vocation) 의식이, 무능을 없애기 위해서는 학습(learning)이 필요하다. 소명 의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일에 대한 목적과 의미 추구, 일과 자기 정체성의 통합, 그리고 타인에 대한 긍정적 영향력 인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을 일상에서 실천하며 일에 대한 자긍심과 책임감을 키우는 것이 소명 의식의 출발점이다. 학습은 평생 학습이어야 한다. 평생 학습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지식이 가진 불완전성, 즉 지식의 반감기(어떤 물질의 양이 초깃값의 절반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하며, 주로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에서 사용되지만 요즘 비트코인 반감기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자체의 유한성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조차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원 안에 있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원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소명 의식을 갖는 것과 평생 학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뇌는 대체로 어려운 길보다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를 줄이려 하기 때문이다. 먼 옛날 우리 뇌는 위험에 처했을 때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그래야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 즉 심장과 다리 근육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우리 뇌는 이런 방향으로 진화했지만 결국 궁극적으로 위 두 가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를 ‘로우 로드’(low load)라고 하는데, 이처럼 외부 환경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이다. 반면 ‘하이 로드’(high load)는 뇌의 특정 영역이 복잡하고 추상적인 문제 해결, 창의적 사고, 장기적 계획 등 고차원적 정보 처리에 활발히 관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하이 로드’는 복잡한 사고와 추상적 사고, ‘로우 로드’는 단순 반복적 사고에 강점을 보인다. 일상에서 일을 할 때 단순 반복적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문제 해결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창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따라서 하이 로드의 관점이 요구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 대부분은 관성으로 일을 하며 결국 로우 로드의 관점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조직에서 일하면서 그 방향이 옳은지를 판단할 때가 있다. 이때 고위직에 있거나 의사결정을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나뭇잎보다는 나무의 줄기, 가지를 봐야 한다. 반면 일선의 실무자들이 나뭇잎은 보지 않고 나무나 숲만 보아도 안된다. 하지만 현실은 의사결정권자가 나뭇잎만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어떤 리더는 나뭇잎은커녕 낙엽만 보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떨어진 낙엽 전부를 샅샅이 뒤진다. 떨어진 낙엽은 더 이상 나무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떨어진 낙엽을 풍성하게 가공하여 숫자로 나온 결과를 최고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하며 자신은 열심히 잘했다고 생각한다. 하이 로드가 아닌 로우 로드의 뇌 회로를 작동하여 일을 한다. 이렇게 우리 사회 곳곳에 많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있다. 원전의 보안을 책임지는 우리의 조직인 시큐텍(주)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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