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도시 경주(Golden City Gyeongju), 네이밍(Nameing)과 브랜드슬로건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신라 금관은 APEC의장국 이재명대통령이 미국 트럼프대통령에 전달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출토 104년만에 6점이 한자리에 전시하는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금관특별전’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오픈런’ 필수가 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는 말을 생각하며 경주시민정신을 반추하며 자랑해 본다.신라 문화유산의 보존을 명분으로 일제강점기인 1910년 발족한 ‘慶州 新羅會’를 모태로 1913년 5월10일에 공식적으로 설립된 조선총독부 관변 단체였던 ‘경주고적보존회’는 조선시대 경주부(慶州府) 관아(官衙)의 내아(內衙) 건물 등을 이용하여 신라 문화재들을 전시하는 진열관을 만들고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가 쓴 ‘온고각(溫古閣)’ 현판을 걸고 백률사의 이차돈순교비와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과 경주 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 옆에 있던 성덕대왕신종과 그 종각 등을 옮겨 전시하였다.1921년 9월 하순에 경주 시가지 남북을 연결하는 현재 봉황로 서쪽 길가, 봉황대 맞은편 언덕에서 우연히 신라 왕릉 유물이 대량으로 나오는 ‘금관’의 첫 발견은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의 전환점이 되었는데, 진열관 학자들은 유물의 관리와 보고서 작성을 위하여 서울로 가져가야한다고 주장했고, 하지만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를 비롯한 경주 거주 일본인과 시민들은 ‘금관총출토유물경주유치운동’을 전개했다. 
 
유치운동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맞서 경주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단결하여 목적을 달성한 일제 강점기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건으로 민간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적절한 시설을 건립하자고 경주 시민 모금운동을 적극 홍보하고 기부금 협조를 호소한 동아일보 기사(1922.4.13)도 나왔다.이후 경주 유지들과 경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진열관 신축 기금 운동이 일어났으며, 1923년 66㎡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金冠庫)이 완성되어 안에는 5개의 진열장이 비치되었고, 금관을 비롯한 금관총 유물을 전시하여 192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하였고, 이후 진열관의 운영은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조선 총독부로 이양되었고, 1926년 6월2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이 개관되었다.광복 직후 1945년 출범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소장품과 100년 전 만들어진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은 ‘금관고’와 함께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前身)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이러한 경주시민들의 문화재사랑과 애향정신을 자랑스럽게 어어가야 하는데 현장을 확인했을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경주문화원이 옮겨간 자리 안쪽에 수령 6백년 추정의 경상북도기념물 두그루 은행나무를 많은 시민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옆 쉼터로 벤치 몇 개가 있는 파고라 자리가 바로 시민들 십시일반 성금으로 건립하여 금관을 진열한 ‘금관고’ 가 있던 장소이다.
경주문화인들이 자랑하는 ‘경주박물관학교’도 옮겨 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운영되었고, 필자도 신라문화동인회의 회원이라 관심을 갖고 없어진 연유를. 수소문했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명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바로 옆 박물관장 사택의 일조권 침해로 철거시켰다는 이야기와 주위 관아 건물과 어울리지 않아서 1978년에 철거되었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다
역사문화도시 경주라 복원해야 할 많은 부분들이 산적해 있고, 특히 해당 부지는 국유재산으로 되어 있어 경주문화원도 자리를 비워주고 이사를 간 현실이 안타까운데 복원까지 갈려면 길이 너무 멀지만 경주시민 정신문화자산도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국유 재산관하는 정부 부서를 설득해야 하는 큰 숙제가 있다.국립경주박물관장 관사도 걸맞게 이전시키고 금관고를 복원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문화재를 사랑하는 시민정신을 교육하는 장소로 (가칭)‘문화재사랑시민공원’으로 일대가 재정비 되었으면 하는 시민들의 바램을 모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