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포석정하면 떠오르는 것이 국가의 위난상황에서도 왕이 궁녀들과 연회를 하며 놀았던 곳으로 국민들 모두에게 각인돼 있다.
신라멸망의 당위성이요 인과론적으로 인식되도록 역사서에 기록돼 있는것이다. 이같은 역사기술의 단초는 삼국사기다.
사기에는 927년 경애왕 11월 견훤이 포석정에서 가무를 즐기던 왕을 잡아 자결시키고 왕비를 욕보이는가 하면 이종사촌인 김부를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이후 김부가 왕건에게 투항함으로써 신라 992년의 천년사직이 종말을 고한다.
최고 역사서에 기록하기를 적이 처들어 온 줄도 모르고 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다 낭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무능과 향락의 결과를 멸망의 당위성으로 엮어 버린 것이다. 포석정이 유희시설이라는 우리의 인식은 사기의 표현으로 이어지는 연장선에 맞춰져 있다. 유상곡수로 대변하는 포석정이기에 안내판조차 연회를 하다 비운을 맞은 장소로 표기돼 있어 우리의 인식과 별 차이가 없다.
역사의 기록에서 오는 불편한 진실은 무엇일까.
첫째 견훤이 침입한 11월 엄동설한에 야외인 포석정에서 궁녀들과 연회를 한다는 억지스러움이다. 기록상의 11월은 오늘날의 양력 력으로 보면 12월이나 1월 초순에 해당한다.
둘째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난에 처해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는 등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처했는데 왕이 향락에 젖어있다고 기술한 것은 사가로서는 하지말아야 할 술이부작을 넘어 무망(誣妄)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셋째 부정적인 인식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오직 고려 건국의 당위성에 초점을 맞췄을 뿐이다. 삼국사기는 유사와 달리 정사로 관에서 편찬한 역사서다.
김부식도 술이부작을 경계했다고는 하지만 민족의 자긍심이라는 명제앞에서는 신화도 기록할 수 밖에 없다고 해 주몽과 박혁거세를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다 나라가 위난에 처했는데도 엄동설한에 포석정에서 유희를 했다라는 억지스러움을 첨가해도 하등 이상할게 없다.
신라멸망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고려건국의 당위성을 주입하는 방법이다.
김부식은 주저함이 없이 ◆ 포석정 연회 ◆ 견훤의 흉폭성 ◆왕건의 온화함 ◆투항한 김부에 대한 배려등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후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사기의 내용을 차용하고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문헌마다 사기의 내용대로 기록하고 있다.
또 후대의 문인들은 사기 내용에다 강도를 높혀 덧칠하고 시문을 읊고 그렇게 흘러 흘러 우리의 인식도 김부식의 의도에 맞게 고착돼 왔다.
지난 19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포석지에서 포석이라는 기와가 발견되고 단순한 유희시설이 아니라 제사를 모시는 신성한 사당으로 보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배척당하고 있는 화랑세기에서 풍월주 화랑 문노를 모시는 사당이 포석사라고 한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 화랑세기에 포석사는 태종 무열왕이 김유신의 둘째 동생 문희와 혼인을 올린 곳이라고 했다.
유사에는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때 남산신이 내려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왕이 따라 춤을 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상곡수의 수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자며 사당 등 포석정을 구성했던 부대시설을 연상하면 단순한 유희공간이 아니라 산신제를 지내거나 혹은 제례의식을 행한 신성한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경애왕은 국가의 흥망이 백척간두에 놓인 상황에서 역대왕들이 그래왔던 방식으로 산신제와 같은 제례의식을 통해 국난을 극복해보려는 발상에서 포석정으로 행차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황상 설득력을 갖는다.
이제는 삼국사기 경애왕편이나 견훤편 모두 난리 와중에 포석정에서 향락을 즐겼다고 기록된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주시가 의지만 있다면 국민 모두가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도록 안내판부터 바꿔 보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역사의 불편한 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