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새해가 돌아오면 한해 운수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일명 영발(신기)을 잘 발휘한다고 소문난 철학관이나 점집을 찾아다니곤 한다. 필자도 영발 높다는 점집을 찾은 적이 있다. 학창시절 진로 문제로 고민 할 때다. 어머니 손에 억지로 이끌려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간 기억이 있다. 
 
이 때 시각 장애인인 그 점쟁이가 내놓은 점괘가 요즘 생각해도 참으로 신묘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는 필자의 생년월일 및 태어난 시간을 묻더니 대뜸, “ 이 학생은 훗날 필명을 널리 알릴 운세입니다. 다만 성격이 너무 올곧아 좋은 점도 있지만 맑은 물엔 물고기가 못사는 법이니 때론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결혼은 서른이 넘어서 하는 게 좋습니다.” 이런 말을 하였다.
가끔 그 점괘를 떠올릴 때마다 일부분은 신통하게 맞힌 듯 하여 ‘사주 명리 학’의 신빙성을 어느 정도 신뢰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그 말을 믿는 것은 필자가 지닌 장, 단점을 점쟁이가 제대로 짚어줘서이다. 장점이 될지 모르지만 평소 원칙을 고수하고 편법을 경계한다. 
 
어느 경우엔 마음에 없는 말도 할 줄 알고 남의 비위도 적당히 맞추는 아부 성 발언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것엔 매우 서투르다. 시대에 뒤떨어진 성향이련만 천성이니 고칠 약이 없다.
의외로 현대엔 솔직하거나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고 하잖은가. 거짓말에 능통한 사람이 사회적응력도 높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 한다고나 할까. 또한 마냥 착하면 복을 받기는커녕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쉽다고 한다. 이로보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용이 제일 바람직하긴 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 삶을 살며 타인을 위해 진심을 다하였으나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도 있긴 있었다. 이런 세태이련만 요즘도 필자는 여전히 타인에게 진정성을 갖고 대하곤 한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진실을 왜곡하는 자들을 도무지 용서 못한다. 더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게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타인을 해코지 하거나 음모론을 꾸미는 자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곤 한다. 
 
웬만하면 ‘그런 개비다.’라고 적당히 넘어가면 될 터인데 괜스레 쓴 소리 바른말을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자가 이런 성향을 지니면, “강하다”, 심지어는 “드세다’ 라고 곱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본다. 
 
오로지 여자는 나긋나긋하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잖은가.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옳지 않은 일에 목소리를 높이진 않는다. 가급적이면 상대방 입장을 헤아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필자가 이렇듯 자신을 스스로 응시하는 데는 주위 사람들 평가도 한 몫 하고 있어서이다. 마치 바둑에서도 곁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더 판을 잘 보듯이, 필자 자신은 모르는 성격을 옆의 사람들이 비교적 정확히 평가하기도 한다. 이것을 비춰 볼 때 나 자신에 대한 단서를 타인이 더 세세히 읽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한 현상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타인을 “이렇다. 저렇다” 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온 사이코 패스나 다중인격자들도 그들이 속한 직장이나 주위에서는, “ 성실하다. 온순하다” 등의 평을 받았다고 하지 않던가. 성격 운운 하노라니 조성모의 노래 ‘가시나무’ 가사가 문득 떠오른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의 쉴곳 없네/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당신의 편할곳 없네/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 숲같네/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하략>’
위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은 듯하다. 불의한 일엔 때론 흑백 논리를 따진다. 타인의 허물 들추는 것을 가장 싫어하면서도 누군가 필자 진심을 외면하면 비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성공엔 질투나 시기심을 느끼기 앞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성격은 개개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삶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주체나 다름없다. 어찌 보면 성격이 곧 운명을 만든다. 이는 인생의 나침반은 곧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펼쳐질 인생사 성공 여부도 성격이 쥐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