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잘못 쓰여지고 있는 대표적인 어휘가 조삼모사다.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라는 조삼모사는 장자의 제물편에 나오는 말이다.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라는 장자의 가르침이다.  송나라 저공이 자신이 키우는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주고 저녁에 4개 주려하자 원숭이들이 불만을 해 그러면 아침에 4개주고 저녁에 3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얘기다.   결과가 같은데도 눈앞의 이익만을 보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이지만 오늘날 변덕이 심하다는 의미로 전이되어 사용하고 있다.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줏대없는 사람을 조삼모사하다고 하는가 하면 상대와의 신의를 고려하지 않는 모사꾼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장자가 살아있다면 통탄할 일이다. 정작 변덕이나 줏대없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단어로는 조변석개나 조진모초가 적격이다.  마음이 수시로 바뀌는 경우와 아침에는 진나라에 붙었다가 저녁에는 초나라에 붙었다는 고사다.  오늘날 장자의 조삼모사는 또다른 측면에서 도전을 받기도 한다.  첫째, 동일함을 알지 못하는 원숭이는 과연 어리석은 것인가.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재화의 가치를 볼때 원숭이의 불만은 당연하다. 아침에 4개를 얻는 것이 풍족함에서 오는 만족일 수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원숭이가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 논리라면 오후에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니까 당연히 아침에 4개를 얻는 것이 보다 실리적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저공이 유연하게 대처해 원숭이들의 불만을 잠재운 것을 두고 현명한 처사라고 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원숭이를 속인 것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면 아침에 3개 주겠다고 했다가 불만이 불거지자 4개로 수정한 것은 저공의 꼼수라는 것이다.   굳이 갈등을 조장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조삼모사한 것은 오히려 저공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오늘날 복지문제나 노사관계에서 불거지는 갈등의 문제도 상대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유연함 없이는 해소될 수 없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단순한 관계에서 공정과 형평의 문제로 발전하고 더 나아가 이제는 만족과 효용성도 고려해야 한다.  장자는 조삼모사를 통해 저공이든 원숭이든 상대의 입장에서 유연한 태도를 가지라는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같은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의 존중은 혜자와의 논쟁에서도 알 수 있다.  장자가 연못속의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물고기는 즐겁겠네" 하자 혜자가 "자네가 물고기도 아닌데 물고기가 즐거운지 아닌지를 어찌 아는가" 라고 반문한다. 이에 장자가 "자네는 내가 아닌데 물고기가 즐거운지 아닌지를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어찌 아는가"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지어락(知魚樂) 논쟁이다. 남이 나와 똑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또 고려 문인 이규보는 '여귀꽃과 백로'라는 시에서 관점의 차이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있다.  백로들이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개울로 날아들다 농부때문에 사냥을 못하고 여귀꽃이 핀 언덕으로 피신해 농부가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는 백로를 묘사한 것이다.  백로는 가랑비에 깃털이 젖어가고 마음은 오직 개울의 물고기에 있건만 사람들은 속세의 욕심을 잊고 고고히 서있다 하네라고 읊었던 것이다.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일찌기 설파한 점에서 인간의 섣부른 판단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새삼 떠오르는 것은 판단의 기준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주관적이다는 것과 객관적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기준의 문제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언행들이 상대를 향하고 있다면 '백로의 마음'을 간과해서는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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