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25세때 동학(東學)에 입교해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선두에 서서 활약했다. 1898년(광무 2) 6월, 천도교 2세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자, 옥리를 매수해 시체를 빼내어 광주에서 장례를 치렀다. 1902년(광무 6)에는 손병희(孫秉熙)와 같이 일본으로 망명,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쇠약해 가는 국운과 부패와 혼란에 찬 사회를 통탄하고 구국의 방도를 논의했다. 당시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을 배관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키로 약속했다. 2월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3·1독립운동에 대한 최종회의에 참석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7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만주에서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