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남구 송정동 박종해 家(朴宗海 家)를 찾아가는 9월의 끝자락 날씨는 숨이 턱턱 막히는 불볕더위였다. 뜨거운 여름을 거닐어 본 사람은 안다. 누구에게나 더함도 덜함도 없는 태양의 그 순수성을.
 
그 뒤 10월의 문이 조금 열리고 다시 찾은 박상진 역사 공원은 잘 가꾸어진 정원과 산책로가 쉬어가라는 듯 자연의 색만 가득 차려 놓고 길손을 유혹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쌓고 쌓아왔는지, 가을에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 것인지, 무엇을 거두어야 할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역사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다. 또 수레 같은 리듬도 있다. 어찌 보면 박종해家도 늘 평탄치만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력을 다해 노력했고 지역의 인재를 키우고 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중인 것 같다.
 
지금의 박종해 家는 울산에서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박상진 역사공원 앞에 자리하고 있다. 세월이 던진 수난사를 몸소 겪으며 예전의 넓은 고택은 사라졌고 토지개발로 보상받은 땅에는 3층짜리 신식건물이 송당문학관이란 명패를 달고 우뚝 서 있다.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며 대대로 울산의 명가로 자리매김한 박종해 家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선친 때부터 대과 급제자가 많아 두루 요직을 거치면서 명문가의 위상을 유지해 왔다. 한문학과 유교 사상에 깊은 식견을 지닌 박종해의 아버지 창릉(蒼菱) 박용진은 울산인이지만 도산서원(안동), 도동서원(대구), 병산서원(안동) 등 무려 8곳의 원장을 지낸 한학의 대가이며 유학자로, 사후에 선생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박종해 家는 1050평의 대지에 행랑채, 안채, 사랑채, 헛간, 창고가 있었다. 그중 연못이 있는 정각채가 독립된 특수한 고가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닌 양반가 주택이었다. 조선조 건축의 백미로 꼽히면서 여러 책에 소개될 정도로 대가(大家)였으나 2010년 토지개발로 인해 고택이 사라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현재는 정각채인 양정재(養正齋)만 박상진 의사 생가 옆으로 이전해 연당이 있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1870년대에 지어진 이 고택은 세련되고 격식을 갖춘 '공(工)'자형 건물로 건축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다고 전해진다. 순릉참봉 경헌 박정복, 그 아들 숭덕전 참봉 양정재 박시준, 그 손자 도산서원장 박용진, 그 증손자 예총회장, 문화원장을 지낸 박종해·박경애 형제, 그 현손 박병욱, 그 오대손 박창현 등 6대가 살던 집이다.
  박씨는 모두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자손이다. 신라 경명왕의 9왕자 중 장남인 밀성대군 박언침(朴彦枕)을 밀양박씨 관향조로, 고려 문종조 문하시중을 지낸 밀성부원군 박언부(朴彦孚)가 중조(中組)가 된다. 
 
고려 충목왕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밀직부원군 박중미(朴中美)를 파조(波祖)로 삼았으니 박종해가는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 자손이다. 조선조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박해(朴晐)가 18대조로, 벼슬을 그만둔 후 청주 귀림현을 거쳐 경북 경산에 정착했으니 제실과 묘소는 경산에 있다.
 
풍천 군수를 지낸 15대조 홍문관 교리 박영손(朴英孫)은 청백리로 살아생전 성종 임금이 내린 사호(賜號) 청풍당(淸風堂)이란 관직을 공식적으로 제수했다. 사호(賜號)는 사망 후 그 명예를 기리기 위해 주는 관직이지만 박영손(朴英孫)의 청렴은 임금의 마음도 움직였나 보다. 박영손은 만년에 영천에 정착했다. 청풍당 사우(祠宇. 사당)와 종택(宗宅) 등이 영천에 있다. 박종해의 9대조로 숙종 때 진사(進士)를 지낸 박창우(朴昌宇)는 임진왜란 후 생활이 어려워지자 물자가 풍부한 울산으로 이거했다. 마침 과거에 함께 급제한 울산 출신 진사(進士) 이동영(李東英)의 권유로 예사(禮師)로 초빙돼 울산 문학의 텃밭을 일구고 풍토를 조성했다.
  8대조인 진사 박세도(朴世衜) 역시 임금으로부터 인증받은 사액서원인 ‘구강 서원’을 창건, 원장으로 추대돼 아버지의 대를 이어 울산의 문학을 발전시켰다. 진사 박창우, 진사 박세도 父子는 영천에서 울산으로 이거해 호계부근 신답리에 정착했다.
  박씨가 송정동에 집성촌을 이룬 것은 박종해의 5대조인 박성창 증 통훈대부규장각 직각(贈 通訓大夫奎章閣 直閣)과 고조부인 증 통훈대부규장각부제학 박사유(朴思裕.贈 通訓大夫奎章閣副提學)가 송정동에 정착해 문호를 열면서다.
 
박사유의 아들 5형제 중 박용복은 진사 급제하여 북부도사 벼슬을 지냈는데 그 아들 박시룡은 대과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둘째 아들 박시규 역시 대과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 규장각 부제학의 벼슬에 올랐으니 박종해의 재종조부가 된다.
독립운동의 상징 인물이었던 박시규의 아들 박상진은 독립운동가 광복회 총사령으로, 김좌진장군을 부사령으로 발탁한 독립지사다. 만석꾼 재산가 박상진은 열다섯 살에 경주 교동의 만석꾼 최준 家의 최영백과 결혼했다. 울산이 박상진 의사의 태생지라면 경주는 그를 성장시키고 그의 시신을 품어준 제2의 어머니다.
  박상진 의사는 과거시험이 없어지고 제1회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해 10명의 합격자 중 1등을 하면서 평양지법 판사에 임명됐으나 사퇴했다. 이후 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면서 만석꾼의 재산과 목숨까지 바쳤다. 1918년 2월 생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1921년 8월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박종해 家도 이때 몰락하고 만다.박종해의 증조부와 조부대에 와서는 대과 급제 2명, 진사 급제 2명, 음사인 참봉 2명이 나왔다. 증조부 박정복이 순릉참봉, 조부는 숭덕전 참봉을 지냈다. 종조부 박시구 역시 진사급제 했는데 이들 모두 문집, 문필이 출중해 그 당시 영남에서는 보기 드문 명가로 자리매김했다.
 
박종해 家의 위상은 인근에서조차 평판이 자자했다. 선친의 우수한 DNA를 물려받은 박종해는 이제 시인으로, 후진 양성은 물론, 지역발전을 위해 더 많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시인으로 우뚝 선 박종해는 울산 남구 송정동 출생으로 경북 중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울산중학교 교사, 대구동부고등학교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이후 고향 울산에서 울산문인협회장, 울산예총회장, 울산북구문화원장을 지냈다.
  부친의 학문과 도덕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박종해 시인이 2005년 5천만 원의 기금으로 제정한 ‘창릉문학상’은 올해 열다섯 번째 수상자를 냈다. 전국의 우수한 문인을 대상으로 주어지는 상으로 현재까지 정민호·김선학·도광의·이상개·김명수·서상만·문영·김원길 시인 등 14명이 수상을 했다.박종해 시인의 작품을 새긴 시비가 2023년 울산 정자 해변에 제막돼 지역 유명 관광지 영구 기념물 형태로 남아있다. 이는 울산이 박종해 시인을 지역 문학과 문화의 상징’으로 인정했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박종해 시인 본인도 지난달 제9회 도동시비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수상 작품은 ‘도동 측백나무 숲 예찬’. 도동시비문학상 운영위원회는 10월 25일 수상 작품을 시비로 제작(500만 원 상당)해 대구 도동시비 동산에 건립했다.“시인이 되지 않았으면 서예가가 되었을 것”이란 말처럼 그의 서예 또한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명필 수준이다.
경헌 박정복부터 박시인의 손자까지 6대가 대대로 살았던 양정재(養正齋)가 손님을 접빈하고 학생들을 교육하며 서당 역할을 했다면 울산에서의 첫 번째 사설 문학관인 송당문학관은 지역 문학의 발전을 위한 창작은 물론 다양한 활동으로 후진을 이끌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