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하면 떠오르는게 천자문이요 천자문하면 한석봉이다. 천자문은 천지현황으로 시작해 언재호야로 끝나는 4언절구 250구절로 된 책으로 천자를 중복글자 없이 절묘하게 짜맞추어 놓은 대서사시다.
우리에게 한석봉과 천자문은 1869년 이원명의 동야휘집이라는 야담집에 실린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와의 떡썰기 내기 시험 이야기로 친숙하게 다가온다.그러나 천자문의 유명세 만큼 제작시기와 동기 나아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 등이 명확하지 않은 서책도 드물다.
천자문은 양나라 무제때 주흥사(470~521)가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후한 말 위나라 종요가 만들었다고도 해 명확하지 않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주흥사의 천자문이다.
주흥사의 천자문은 무제에 의해 경전을 읽기 위해 먼저 알아두면 좋은 글자로 왕희지의 글씨에서 천자를 가려 가르치도록 하라고 해 만들어진 교육용교재로 알려진다. 때문에 사서를 바탕으로 고사를 압축 인용하면서 운율을 맞추어 4언절구로 정교하게 짜맞추어 놓은 한문공부의 필독서다.
우리나라에 천자문이 전해진 것은 신라 법흥왕 8년 521년에 양나라 승려 원표가 사신으로 오면서 불경과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고 돼 있다. 또 일본서기에는 285년 백제 왕인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이 왜에 문물을 전했다는 것은 우리의 문헌에는 찾을 수 없고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존한 행적에 불과하다. 만약 천자문을 왕인이 전했다면 시기상 주흥사가 만든 천자문이 아니라 다른 천자문이다. 또 일본서기의 연대는 통상 120년이 연장된 것으로 285년의 상황은 405년으로 기산해야 우리의 삼국시대와 일치한다.
문제는 고구려가 372년에 태학을 설립하는데 반해 백제의 교육기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며 근초고왕때인 375년에 고흥박사가 백제서기를 편찬했다고만 사기에 언급하고 있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문물의 도입이 늦었던 신라는 545년에야 국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신라의 한자보급에 대한 사기의 기록은 12대 첨해이사금 5년 251년에 한기부 사람 부도가 집이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글자와 산수를 잘해 6두품인 아찬으로 임용하고 물장고사무를 맡겼다고 돼 있어 글자 보급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천자문은 유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된다. 소위 교육용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1527년 최세진이 지은 훈몽자회는 천자문의 대안으로 나온 책이며 정약용도 아학집이라는 아동용 교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주흥사의 천자문은 선조 16년 1583년에 한석봉에 의해 천자문이 발행돼 한문교육 입문용으로 일반화 됐다. 그러나 천자문이 한문 입문용교재로서의 부적합 논란은 오늘날에도 상용한자 1800자와 비교해 도마에 오르고 있다.
1천자중 상용한자는 7백50자에 불과해 입문용이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사서삼경을 마스터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한자 일색이라는 평가다. 예를들면 숫자에서 三 六 七을 비롯해 방향의 北 계절의 春 자연의 山 색상에서 綠 작다는 小등의 평범한 글자조차 천자문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때문에 결코 만만히 볼 천자문이 아니다.
첫구절인 천지현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경을 알아야 하고 우주홍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서인 회남자와 태현경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주흥사의 천자문이 천지현황으로 시작하는데 반해 다른 천자문은 二儀日月로 시작한다고 전해진다.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주흥사의 천자문이 우주의 대본을 해와 달에서 역경의 구절을 인용해 하늘과 땅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우주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천자문이지만 오늘날 전해지는 천자문은 뜻풀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함축하고 있는 철학적요소까지 파악해야 완전하게 다가온다. 누가 감히 천자문을 쉽다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