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동물과 달리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한다. 그래서 말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도 언행을 보고 상대방 됨됨이를 가늠한다. 가족이든 타인이든 언어 소통이 잘 되고 이로 인하여 교감이 잘돼야 인간관계도 돈독해진다.
 
더구나 스마트폰이 상용화된 이즈음엔 모든 소통을 카톡 문자나 전화로 이루어지기에 이에 따른 문구나 언어도 신경을 써야 한다. 스마트 폰은 편리하고 신속한 점도 있지만 이와 달리 폐단도 없지 않아 있다. 필자 경우 점점 사람과 만남의 횟수가 줄어드는 게 첫째 사유이다.
 
웬만한 일은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니 굳이 바쁜 시간 쪼개어 만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나 할까. 이와 달리 사람은 만나서 서로 눈빛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눠야 정도 들고 소통도 잘 이루어진다면 구시대적 발상이려나.
평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는 필자여서 그런가 보다. 별일 아닌 일로도 상대방을 만나서 밥을 함께 먹고 찻잔을 앞에 놓고 대화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이는 필자가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상대방 체취에 취하며 대화를 나누면 행복해서이다.
 
무엇보다 핸드폰으로 수다 떠는 것을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겨서이기도 하다. 또한 문자로 의견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일엔 매우 서투르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 카톡 문자로 상대방에게 의사전달을 할 때엔 신중히 생각하는 버릇도 있다. 문자란 자칫 잘못 표현하면 반영구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물론, 오해의 소지도 있기 마련이어서이다.
 
필자 경우 특히 글을 써서인지 상대방이 보내오는 문자 한 자 한 자도 세심히 살피고 생각하며 읽는 습관이 있다. 이 탓에 타인에게 문자를 보낼 때 역시 조심스럽게 쓰곤 한다. 이는 누군가에게 의사를 문자로 보낼 경우 비록 짧은 글이지만 그 속에 상대방을 존중하는 예의도 함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연말연시가 가까울수록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혹은 얼마 남지 않은 새해를 겨냥해서 덕담을 문자로 주고받기도 한다.
이때 필자는 상대방에게 정성껏 덕담을 보냈으나 상대방은 아주 짤막하게, " 네" 혹은 " 고맙습니다" 라고만 할 경우 왠지 서운한 감정이 든다면 필자만의 옹색한 생각이런가. 한편 너무 사무적이어서 매우 인간미가 없고 예의가 없다는 생각마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내 쪽에서 진심을 다하여 이런 문자를 보냈다면 적어도 따뜻한 내용의 문구로 답해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다.
하긴 현대엔 메일이나 문자를 보내오며 그 흔한 안부 인사 한마디 없이 떡하니 파일만 보내오는 경우도 종종 본다. 아무리 바쁘고 삶에 쫓긴다고 해도 메일이나 문자를 보낼 때 격식과 예의는 분명코 갖춰야 할 것이다.
 
이렇듯 글자에 대하여 논하노라니 유행가 가사에도 불완전한 영양 결핍 낱말들이 표현된 게 눈에 띈다. 오래 전 작곡, 작사한 노래지만 그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남백송이라는 가수가 부른 '방앗간 처녀' 경우만 해도 그렇다.
 
'거울같은 시냇물/ 새들이 노래하는/뻐꾹새 내 고향/ 자명새 내 고향/ 오늘도 방아간에 보리 찧는 처녀는/가슴에 고이 자란 순정을 안고/버들피리 꺾어 불며 님을 부르네'라는 가사 중 시제의 혼란 및 불일치를 엿볼 수 있다.
 
즉 처녀는 지금 방앗간에서 한창 보리방아를 찧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런데 몸이 둘이 아닌 이상 어떻게 방아를 찧으며 또 밖에까지 나가서 버들피리를 꺾어 불 수 있단 말인가?
 
시제의 불일치도 있다. '보리 찧는' 이라는 현재형 표현을 '찧던'이라는 과거형으로 바꿔 표현 했어야 맞다. 유행가는 한번 발표되면 영구적으로 곡이나 가사가 보존된다. 아울러 대중들이 부르는 유행가이니만큼 곡이나 가사 내용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노래들이 때론 교실 없는 선생님 역할도 한다. 이런 점을 참작하여 작사가들은 탈법적인 문장을 경계, 사리에 닿도록 논리적인 표현에도 마음을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