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여왕을 배출한 나라는 신라가 유일하다. 27대 선덕을 비롯 28대 진덕 51대 진성 등 3명의 여왕이 나라를 통치한 것이다. 이는 중국을 비롯 세계왕정사에서도 보기드문 사례로 여왕등극의 이면에는 신라의 골품제도가 있었음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당 태종은 선덕의 등극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나라의 안정을 해칠 것이라고 악담을 하기도 했다. 김부식도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빈계지신(牝鷄之晨)으로 폄훼한 것을 보면 여왕의 등극은 파격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남자 성골이 없어 부득이 장녀인 선덕을 후계자로 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왕실 주변의 분위기는 여성을 왕으로 받이들이는 것에 반발해 칠숙 석품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선덕은 여왕이라는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자장을 중심으로 사상적인 통일을 주문하는 한편 대규모 불교 건축사업을 통해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또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춘추와 유신에게 대당 외교와 군권을 위임하고 안정적인 통치를 함으로써 항간의 우려와 불신을 만회하는데 진력했다. 재위 16년동안 건립된 사찰이 25개이며 3대 건축물이라는 황룡사9층탑과 첨성대 분황사를 건립해 남성군주 이상의 배포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위기간 내내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을 비롯해 50여개의 성을 빼앗기는 등 빈번하게 전쟁이 지속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또 선덕 말년에 사촌인 진덕을 후임 왕으로 승계할 움직임을 보이자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후계 승계작업도 순탄하지 못했다.
비담은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신의 활약으로 난이 진압되고 진덕여왕시대를 맞이한다. 진덕은 유교를 국가경영의 새로운 이념으로 내세우는 한편 외교적으로 당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등 훗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성골시대를 마감하고 진골시대를 연 태종무열왕이건만 신라하대에 들어 극심한 혼란속에 다시 진성이 51대 왕으로 등극한다. 이때는 이미 망국의 그림자가 짙어가는 와중이며 20대의 젊은 여왕이 국정문란으로 양길 궁예 견훤이 잇따라 거병하는 등 사직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처럼 통일 전후에 등극한 3명의 여왕시대는 능력과 권력의 세기로 왕이 된다는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측천무후도 40여년을 통치했으나 15년간 자칭 황제로 그쳤다. 국정의 전권을 휘둘렀던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와 한나라 유방의 비였던 여태후 역시 황제가 아닌 태후에 머물렀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왕의 등극은 단순히 능력을 비롯해 국정장악력이나 사회의 혼란 등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신라 여왕시대의 배경에는 첫째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신라 특유의 골품제도에서 연유한다. 둘째는 성의 개방성과 여성의 지위향상이다. 이 역시 골품의식의 소산으로 골품끼리 혼인을 강요하다 보니 근친혼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골품끼리의 사통도 크게 문제될게 없는 성의 개방성이다. 이러한 풍속으로 여성에 대한 거부감은 희석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셋째는 신라에 뿌리내린 정토불교사상으로 나타나는 왕즉불이념이다. 불교의 공인 이후 다져진 왕즉불이념은 진평때 성골의 개념으로 굳어지면서 선덕이 여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신라의 여왕통치는 단순히 제도나 성별의 문제를 떠나 신라사회의 근간이었던 불교와 뿌리깊은 골품제도의 토양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신라의 골품제도를 과거의 차별적 통치수단으로만 볼게 아니라 명멸하는 국가흥망사에서 천년왕조로 이어진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역사를 바로 보고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