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 주부들은 만나면 대개 인사말이 비슷합니다. 김장 했어요? 겨울을 날 준비라면 단연 김장과 연탄 준비가 가장 우선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난방을 주로 연탄에 의지했으니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려면 연탄 창고에 연탄을 충분히 비축하고 김장으로 겨우내 식구들 밥상을 책임질 김치도 넉넉히 준비하면 주부의 겨울 준비는 거의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대부분의 가정에서 김장이라면 배추 100포기, 무 100개 정도는 예삿일이었습니다. 우리 식생활에서 으뜸 자리는 밥과 김치가 차지합니다. 갓 지은 흰쌀밥과 김치는 최고의 궁합을 이룹니다. 거기에 된장찌개가 곁들여지면 그야말로 그 자체가 진수성찬입니다. 중세 한국어 문헌에 김치는 '딤치'라고 표기되었지만 지금의 김치와는 재료와 모양이 달랐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집에 갖추어진 김치냉장고라는 것이 처음 나왔을 때 브랜드 이름도 여기에서 가져온 ‘딤채’였지요. 과거에 마당에 움을 파고 김칫독을 묻어 보관했지만 주거형태가 아파트로 변하면서 나온 우리나라만의 가전제품일 것입니다. 요즘은 김장을 하지 않는 집도 많이 생겼더군요. 마트에 가면 한겨울에도 얼마든지 신선한 무, 배추를 살 수 있는데다 더욱이 아예 만들어서 판매하는 김치도 종류별로 갖추어져 있으니, 수고롭고 번거로운 김장을 애써 할 필요를 못 느끼겠지요.    그렇지만 한국인에게 김장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김치를 담근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먹거리든 입성이든 넘쳐나는 오늘날에사 굳이 힘들여 준비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을 돈만 있으면 언제든 구매할 수 있습니다.    과거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던 때, 장을 담그고 김장을 하는 것은 식구들의 한 해, 한 겨울을 담당하는 중요한 반찬이었고 그래서 ‘김장과 장 담기’는 ‘일상을 잘 보내기 위한 준비’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준비는 계획을 동반하기에 김장을 하면서 몇 식구가 언제까지 먹을 양인지 가늠하여 준비하고 알뜰하게 소비했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구할 수 있는 요즘과 같지 않았기에 내일을 위한 준비를 오늘 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결핍과 직결됩니다. 김치 없이 겨울을 나거나, 된장‧간장 없이 한 해 식생활을 꾸려야 한다는 사실은 상상만 해도 허기가 지는 일이 됩니다. 곰곰 생각하면 김장뿐 아니라 삶은 언제나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비록 오늘의 삶이 녹록치 않아도 내일을 기다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 것으로 다시 떠오를 내일을 위한 준비라고 하겠습니다. 주체가 사람은 아니지만 크게 내 마음을 움직인 어떤 현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오월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여행 중에 눈에 띄는 산들이 모두 노랑색, 보라색, 분홍색 등 밝고 고운 색의 물감으로 면을 채운 추상화같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꽃들이 산을 뒤덮을 수 있는지 감탄하는 내게 가이드 노릇을 하던 아들이 ‘수퍼 블룸(super bloom)’이라고 말해줍니다. 캘리포니아는 원래 비가 극히 적은 기후지만 몇 달 전 겨울에 엄청난 홍수로 물난리를 겪었답니다. 사람에게는 야속한 자연재해지만, 이처럼 7, 8년에 한 번 씩 내리는 엄청난 폭우가 땅을 적시면 그때껏 싹을 틔우지 못하고 메마른 땅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씨앗들이 한꺼번에 깨어 폭발적으로 꽃을 피워 야생화 군락을 이루는 현상을 수퍼 블룸이라고 하더군요.    씨앗들은 그런 비가 내리기를 7, 8년이나 땅 속에서 기다리며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요. 며칠만 물을 주지 않아도 시들어 축 늘어지는 내 화분들을 생각하면 한두 달, 한두 해도 아닌 몇 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메마른 땅 속에서 기다리며 언젠가는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을 준비를 했을 야생화 씨앗들의 끈기와 기다림에 경이로움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준비하며 사는 사람에게 내일은 기회의 손을 내밉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내일을 맞을 마음가짐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새 날이 밝습니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도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 기쁜 날은 찾아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이라 노래했습니다.    저물어가는 이 해가 혹시 기쁜 일보다 절망적인 일이 더 많았던 해였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고’ 곧 다가올 미래인 내년을 맞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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