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는 오래된 포구의 시간, 파도와 바람이 깎아낸 해안의 결과 여전히 생활의 냄새를 간직한 바다 마을의 풍경까지 다양한 지층을 가진 경주의 또 다른 자산을 간직한 보고다.
감포는 ‘잘 알려진 곳’이면서도 동시에 ‘다 알지 못한 곳’이다. ‘전촌항 용굴’도 감포가 선사하는 또 하나의 비경으로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명소로 부각됐다.용굴은 감포깍지길 8구간, 감포읍 전촌1리 거마장 아래 숨어 있다. 보랏빛 해국 자생지로 알려진 이 길 끝자락, 용들의 전설을 간직한 바닷가 동굴은 아직까지도 이곳 토박이들조차 “정확히 어디냐”고 되묻는 장소다. 그만큼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용굴로 향하는 길은 그리 만만치 않다. 전촌 바다 어귀에서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걷다 보면 금세 숨이 찬다. 데크길이 설치돼 있지만 몇 차례 태풍을 겪으며 데크 계단 곳곳이 뜯겨나가고 삐걱거리고 흔들린다. 그 ‘허약한’ 계단 아래로 용굴의 자태가 바로 드러나 보인다. 관리 소홀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길 수밖에 없지만 용굴에 다가선다는 설레임으로 조금 더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길가 절벽과 바위틈에는 한때 보랏빛으로 뒤덮였을 해국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해국은 용굴 위 바위틈과 정상부까지 자생하고 있다. 지금은 겨울바람에 꽃잎을 떨구었지만 바위 위에 남은 줄기와 잎사귀만으로도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전국 어디에도 이만한 해국 군락지는 없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풍경이 먼저 증명하고 있었다.
용굴은 거대한 기암이다. 가까이 다가서면 그 위용은 더욱 또렷해진다. 둥글게 뚫린 세 개의 바위굴. 마치 성문처럼 사면에 난 구멍 사이로 파도가 밀려들고 빠져나간다. 먼바다에서 달려온 파도는 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세 방향으로 뿜어져 나온다. 시꺼멓게 푸른 물빛이 동굴 안에서 소용돌이칠 때 이곳은 더 이상 평범한 관광지가 아니라 태초의 현장이 된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양말을 벗은 채 자갈 위에 섰다. 몽돌 사이로 밀려오는 겨울 바다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웠다. 파도는 거칠었지만 일상의 소음이 한순간에 지워져 버린다. 주민들 가운데는 용굴의 형상을 두고 “마치 큰 용이 날개를 펴고 바다로 향하는 모습과 같은 형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하는데 적절한 비유인듯 했다.
이곳 용굴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감포읍지’에 따르면, 전촌리의 옛 이름인 ‘장진리(부락명)’에는 갈대밭이 많았다고 한다. 맑은 물에 사는 담룡(淡龍)과 뱀이 변해서 용이 되었다는 사룡(巳龍)이 오래 같이 살았다는 예부터의 전설이 있다. 두 용은 사는 곳이 달라 오랜 세월 싸움을 벌였고 그 다툼에서 비롯된 지명이 바로 ‘장진’이라는 것이다. 용굴은 이들이 머물던 굴로 전해진다.
전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닷속에서 솟구치는 물기둥과 세 방향으로 뚫린 바위굴의 형상은 이곳이 왜 ‘용의 거처’로 불렸는지를 직관적으로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무당들이 이곳을 찾아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바위굴이 삼면으로 트인 특이한 구조와 전설이 겹치며 용굴은 여전히 ‘영험한 장소’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 풍경은 근대 이전의 지식인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상욱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에 따르면,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묵헌(黙軒) 이태수(1799~1857)는 ‘남유일기(南遊日記)’에서 용굴을 직접 찾아 그 풍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70여 년 전의 일이다.
묵헌은 경주 동해 장진의 용굴, 즉 ‘공암(孔巖)’에 올라 “높다란 거북바위가 해변가에 웅크리듯 있고 가운데는 굴이 나 있는데 사면에 성문처럼 구멍이 났다. 고래 같은 파도가 들이닥치고 세 곳의 구멍으로 뿜어져 나가니 정말 볼 만했다”고 적었다. 지금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놀라울 만큼 닮은 기록이다. 오상욱 원장은 “이 기록은 용굴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오랜 시간 인간의 감각과 언어를 자극해온 장소임을 증명한다. 지금이라도 ‘남유일기’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해설판과 콘텐츠를 정비한다면 용굴은 경주 동해 관광의 중요한 인문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용굴 주변에는 다양한 사연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임진왜란 당시, 마을 주민들이 왜구를 피해 숨었다는 ‘죽공암’ 이야기, ‘강씨 처녀’가 끝내 은신처를 밝히지 않고 목숨을 잃었다는 전설, 그리고 1970년대 간첩 6명이 이 일대 거마장 주변의 바위틈 해안 암초로 침투해 용굴 속에서 지내면서 정찰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이후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군사 지역이 됐고 2010년 전후에야 제한적으로 개방됐다고 하니, 비교적 덜 알려진 이유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엔 SNS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쉽게 이곳을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지금도 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며 민간인 출입이 잠정적으로 허용되었을 뿐이므로 여전히 군사 지역이라고 한다.용굴의 암질은 바위의 색이나 모양으로 미루어 송대말 등대 주변의 돌들, 주상절리의 암질과 거의 유사하다고 한다. 날씨가 쾌청하고 파도가 잔잔한 날이면 바닷속 몽돌들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점도 이곳 용굴의 자랑이다.
이곳 주민들에 의하면 ‘용굴 근처에는 사자머리를 닮아 ‘사자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군인들이 보초를 설 때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바위 일부를 깨버렸다’고 말했다. 지금은 원래의 사자바위 형상을 알아볼 수 없다. 이곳 어르신들은 깨진 바위가 지금의 용굴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전했다. 현재의 용굴은 그 천연덕스러운 아름다움에 비해 아슬아슬한 부분이 많다. 취재 당일 평일 오후임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경남 사천에서 왔다는 한 관광객은 “스케일이 아주 크진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사진 찍기 좋다”고 말했다. 대구서 온 방문객도 울산대왕암과 비교하면서 “대왕암 못지않은 비경을 가지고 있는데 관리가 너무 소홀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난간과 계단은 불안정하고 용굴 정상으로 이어져 있었던 낡은 가드 라인과 기둥은 넘어져 있었다. 데크는 임시 보수의 흔적만 남은 채 근본적인 안전 점검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점차 늘고 있는 추세인만큼 하루 속히 점검하고 보수 및 철거를 해야 할 시점으로 보였다. 용굴은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용굴을 대하는 사람들의 발길이다. 태연하고 검푸른 감포 바다의 갑각처럼 겹겹이 쌓인 시간 속에서 소환된 용굴은 감포가 아직도 간직한 가장 건강하고 깊은 얼굴이다. 이것이 용굴을 재정비하고 보존해야 하는 책무의 이유일 것이다.